중국고전에서 명언만 모은 ‘중국고전명언사전’
일본인 모로하시의 삼십년 장인정신의 결정판
지인에게서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귀한 책을 한 권 구했다는 소식이다. 십여년 전에 이미 절판된지라 중고서적 판매사이트를 이용했다고 한다. 잠시 후 표지와 속지 한 페이지까지 핸드폰 영상으로 또 보내준다. 꼭 필요한 책이니 반드시 구매해두라는 당부까지 덧붙였다. 여기저기 사이트까지 검색하면서 부지런히 손품을 판다면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귀띔까지 했다.
손놀림이 재바른 20대 젊은 직원에게 전후사정을 전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싸게 구입해 보겠노라고 하면서 ‘아제세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린다. 아니나 다를까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택배가 도착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고 책 가격이 새 책 원가의 3배나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라면 고서가 아닌 요즘 책도 경제적으로 투자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책을 사기만 했지 팔아본 적이 없는, 내가 소유한 책들도 인터넷 시장에 올려볼까 하는 호기심까지 발동했다.
잿더미가 된 서재에서 기적처럼
바쁜 마음으로 후다닥 포장된 박스를 뜯었다. 낮잠용 베개를 해도 손색없을 만큼 두툼한 두께에 붉은 색 표지가 주는 포스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고전 속에서 명언만을 뽑아놓은 사전이다. 편자는 그 유명한 모로하시 데쓰지(1883~1982)였다. 동북아 문화권에서 한문께나 읽었다고 한다면, 누구나 그의 신세를 져야하는 유명인사다. 15권짜리 대한화사전의 저자인 까닭이다.
‘모로하시 사전’은 장인정신의 삼십년 결정판이다. 한참 작업 중이던 서재가 2차 세계대전 말 교토공습으로 폭격받아 모든 자료는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성에 하늘마저 감동했는지 3쇄 교정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흰 종이에 박힌 촘촘하고 흐릿한 글씨를 오래도록 살피다보니 백내장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수술까지 했으나 한 쪽 눈은 결국 실명했고, 남은 눈도 시력저하로 작은 글자는 돋보기를 이용한, 뼈를 깎는 고통의 결과물이였다.
이 사전편찬의 기획자이면서 후원자요, 또 실무책임자로서 숨은 공신인 대수관서점의 스즈키 잇페이사장은 아들 3명의 학업까지 중단시키고 이 간행사업을 돕도록 했다. 현재 최대 불교사전을 지향하는 가산불교대사림 작업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 지난함은 익히 보고 들어서 알고 있다. 지금같이 컴퓨터 편집도 이러할진데 하물며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활자를 제작해야 하는 그 시절의 노고는 상상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읽는 그 자체로 수행이 되는 글
모로바시 선생은 많은 예문을 인용하는 사전을 편집하면서 결코 차가운 기능인에 머물지 않았다. 당신의 가슴을 울려주는 명언은 따로 모아 두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후속 마무리를 위한 세월도 8년이다. 그 결과물인 중국고전명언사전의 짧은 서문의 첫마디와 끝마디는 “고전에 실린 명언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좋은 글을 자주 반복하여 읽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뜻이다. 읽는 그 자체로 수행이 되기 때문이다. 한글 번역자와 용기있는 출판인 덕분에 곁에 두고 늘 읽을 수 있는 인생지침서를 늦둥이처럼 얻은 것이다.
얼마 전 돈황학대사전이 출간되었다. 자료수집과 집필에 13년이 소요되었고 한글번역에 4년이 걸린 책이다. 독자로서 사명감과 함께 늦게사 중고 사전을 샀던 일을 반성도 할 겸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크고 무거운 책인지라 두 겹으로 겹쳐진 튼튼한 끈이 달린 종이봉투에 담아준다. 늘 어깨에 메고 다니는 회색빛 헝겊가방에 넣기가 부담스러운 것을 따로 담아야 할 때는 이 쇼핑백을 재활용하고 있다. 겉에 디자인으로 박아놓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명언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것을 들고 자주 종로거리를 활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