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아름지기’ 조화로운 아름다움
옛 것을 본받아 다시금 새롭게 창조
서촌입구 통의동 ‘아름지기’사무실까지 거리는 그야말로 지척이다. 새 사옥으로 이전한 지 이미 석삼년이 지났고, 종로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인사를 차려야 할 곳에 아직도 가지 못했으니 부채아닌 부채감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밀집모자를 눌러쓰고 경복궁 안길을 가로질렀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현대식 마천루와 중세식 궁궐이 대비감을 이루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한국시대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한복 입은 젊은이들이 셀카를 즐기며 까르르 내지르는 웃음소리가 더 큰 관광자원이다. 사람이 궁궐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정육면체로 다듬어 한 개 한 개, 한 켜 한 켜 잇고 쌓은 고궁의 하얀 화강암 돌담의 옆구리 문을 통과하니 다시 도로가 나온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전시장과 건물을 둘러봤다. 철 지난, 지나도 한참 지난 ‘집들이 인사’가 되었다. 방명록에는“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창조한다)”을 남겼다.
아름다운 우리 것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인 ‘아름지기’ 인연은 벌써 십오년을 훌쩍 넘겼다. 현재 해인사 박물관 자리에 ‘신해인사’를 만들어 신행공간과 수행공간을 분리하여 사찰을 운영하겠다는 계획 아래 이루어진 ‘해인사신행문화도량’ 설계공모전을 옆에서 거들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프로젝트는 설계도면만 남긴 채 도상계획으로 끝났다. 그래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남기기 마련이다. 그 일을 계기로 이 모임을 후원하는 회원이 된 까닭이다.
처음 이 단체를 방문했을 때 사무실은 안국동 윤보선길의 샛길에 있는 삼십여평의 작은 한옥이었다. 그 무렵 북촌에는 경제논리에 따라 한옥을 사정없이 헐고 주저없이 4층 빌라를 올리는 바람이 유행처럼 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뜻있는 이들의 우려가 문화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맞바람을 일으켜 한옥보존 붐이 일기 시작했다. ‘아름지기’도 힘을 보탰다. 한옥은 절대로 불편하지 않다는 ‘모델하우스’의 역할을 자청하며 작지만 야무진 그 ‘리노베이션 한옥’을 개방했다. 한옥에 살기를 꿈꾸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관광인파 탓에 사무실 기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재생 한옥에 전시홍보 기능만 남기고 사무기능은 인근 빌딩으로 옮겼다. 이내 두 기능의 분리로 생긴 불편함을 직원들이 먼저 호소했다. 십여년 준비 끝에 드디어 통합사옥으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멀리서나마 듣게 되었다.
새 사옥의 저층부는 노출 콘크리트, 중층부는 나무, 상층부는 불투명 유리박스를 기본재료로 사용했다. 전시공간과 사무공간, 그리고 연구공간을 결합시켜‘ 최적화’한 상태에서 한 집안에 여러 쓸모들이 모여 관계를 맺고 그 큰 틀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지은 집이라고 소개했다. 한옥과 양옥의 조화, 전통과 현대문화유산의 조화. 현대건축과 고건축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이층 마당에 독립된 한 동의 한옥 바닥재는 돌이었다. 전시공간 기능을 겸하기 위해 신발을 신은 채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동쪽에 두 평짜리 온돌방을 넣어 한옥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창문은 삼베를 이용하여 방충과 통풍을 동시에 해결하는 옛날 방식을 사용했다. 여름장마에 조금 쳐져 우는 것을 빼고는 그 기능성에 만족한다고 했다. 양옥과 한옥, 조경 설계는 ‘해인사 신행문화도량’ 시절에 이름자를 익히 들었던 각분야 여러 대가들의 합작품이었다.
그 퓨전사옥에서 10여m 곁에 있는, 60년대 시절을 그대로 간직한 허름한 식당에서 메밀콩국수와 메밀전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청와대 앞길에서 이런 구식집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주인장의 고집이 또 다른 문화보존운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가게 앞의 화분에 메밀을 심어 담장나무처럼 세웠다. 메밀꽃도 피웠다. 옆 가게를 인수하여 주방을 넓혔음에도 옛날집 원래 간판을 그대로 두었다. 그것은 가게의 확장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시대의 또 다른 문화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