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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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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나라가 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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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jpg» 임진왜란 때 선조가 평양성으로 도망가면서 임진강을 먼저 건넌 뒤 백성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배를 불태우는 장면. 문화방송 드라마 <구암 허준>의 한 장면

우리 모두 ‘존중받아야 할 권리와 존중해줘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 존중의 소중한 의미를 알아보려면 역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 존중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우리의 아픈 단면들을 돌아볼까 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이 됩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조선사회에 뚜렷한 변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을 주제로 강연하는 제가 보기에도 임진왜란은 곱씹고 되씹어야 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592년 4월, 왜군 18만 7,0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부산포로 쳐들어왔습니다. 그 당시 조선을 지키는 군인은 실질적으로 8,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군인은 문서상에만 존재할 뿐,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고 무기도 보급 받지 못했습니다

부산포에 쳐들어온 날로부터 정확히 17일 만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왜군 4만 명이 한양에 도착합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 중기에 곳곳에서 전투를 치르면서도 부산에서 한양 길을 보름 만에 막힘없이 당도했다는 사실은 조선에 나라를 지킬 군인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로써 국토는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특히 조선의 딸들이 철저히 짓밟혔습니다. 조선의 남쪽이 왜놈들에게 처절하게 유린당하는 동안에, 북쪽 지방은 조선을 구하겠다고 건너온 명나라 군대에게 조선의 처자들이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왜군이 거침없이 질주하여 한양에 도달할 즈음, 선조 임금은 이미 북쪽으로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아직 왜군이 한양에 당도하지도 않은 시각인데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이 몽땅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누가 그런 걸까요?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제일 먼저 불태운 관청이 노비문서가 있던 형조의 장예원입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백성들의 한이 그리도 깊었던 것입니다.

한양을 벗어난 선조는 계속 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평양성의 백성들이 임금을 가로막으며 자신들과 함께 왜적을 막기를 간절히 호소했지만, 선조는 어서 의주로 가서 명나라 땅으로 도망가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의주로 간 선조가 압록강 앞에 섭니다. 그곳에서 선조는 명나라 황제에게 어버이의 나라에 가서 기꺼이 죽겠다며 자신을 받아달라는 편지를 바치려고 합니다. 그때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를 가로막고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 조선 인구의 7할이 노비입니다. 이들에게 왜놈 목 하나를 잘라오면 상을 주고, 두 개를 잘라오면 면천을 해주고, 세 개를 잘라오면 벼슬을 준다고 하십시오.”
03523323_P_0.JPG» 영화 추노. 한겨레 자료 사진.
이 말을 듣고 왕은 한참을 망설입니다. 평소 사람도 아니라고 여겨온 노비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긴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하기에 이 같은 명을 내리니 천민들은 귀가 솔깃합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천민으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곤 죄다 이순신 장군이나 의병들의 휘하로 들어가서 죽어라고 싸웁니다. 면천을 위해서 죽자 살자 덤비는 조선 군사들을 보고, 왜군은 왜 그렇게 달려드는지 죽으면서도 깊은 속사정을 몰랐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주인공은 조선의 임금이나 관군이 아니고, 나중에 구원병으로 건너온 명나라 군대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바로 양반들한테 무시당하고 짓밟히며 살아온 일반 백성들이 그 악랄한 전쟁을 끝냈던 것입니다. 이들은 곽재우, 고경명 같은 의병대장 밑에 들어가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당시 의병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 싸우는 동안에는 계급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천민들은 소금에 절여두었던 왜군의 목을 들고 관청에 가서 면천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양반들이 펄쩍 뜁니다. 왜군의 목을 자른 공로를 인정해서 면천해주면 나라꼴이 엉망이 된다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천민들을 면천하면 결국 백성들이 나라를 구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니 선조 입장에서는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선조는 양반의 말에 동의하고 없던 일로 해버립니다.

선조는 끝까지 자기가 명나라 군을 모셔 와서 왜군을 물리쳤다고 우겼고, 그렇게 역사책에 기록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선조는 전쟁이 끝나고 포상을 할 때 앞장서서 싸운 의병과 평민, 천민들에게는 거의 혜택을 주지 않고, 오히려 의주까지 왕과 함께 도망갔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립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한복판을 살았던 백성들은 이렇게 용렬하고 비루한 왕을 주군으로 모시고 그 힘든 세월을 버텨냈습니다.

세월이 훌쩍 흘러 1894년이 되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커져갔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해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수탈과 횡포를 참고 참다가 들고일어난 전쟁으로, 조선 천지 곳곳에 들불처럼 번져 나갑니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을 타도하기 위해 시작한 혁명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해서 경상도와 충청도까지 파죽지세로 뻗어나가 마침내 한양만 뒤집어엎으면 새 세상이 올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고종은 300년 전에 선조가 그러했듯이 청나라에 급히 도움을 청합니다. 청나라 군사 2,800명이 조선으로 들어오고,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 빠르게 군사 8,000명을 보냅니다.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 땅 성환, 아산, 평택, 나중에는 평양까지 전선을 확대해서 온 나라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입니다

05275988_P_0.JPG» 명성황후. 김태권 만들고 이은경 찍다. 한겨레 자료 사진.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정세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집니다. 예상 밖으로 일본이 청나라를 쉽게 물리치자 위기를 느낀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에게 경고하고 발을 묶어두려 합니다. 그러자 1895년 10월에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명성황후를 경복궁에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한 나라의 왕비조차 지켜줄 사람 하나 없던 조선은 그렇게 처절하게 망해 갔습니다.

을사늑약을 맺은 1905년부터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 사이 5년 동안 크고 작은 의병이 일어났지만 기울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저물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조선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여러 이유를 대고 있지만, 저는 오랜 세월 백성을 사람대접 하지 않은 왕과 양반네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 내내 오직 한 사람, 군주만을 위한 정치를 했고 권력에 빌붙어 일신의 안위만 챙긴 양반들만이 기득권을 누렸기에 벌어진 엄혹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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