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겨레 자료 사진.
올해는 차와 선이 한 맛으로 통하는 깊은 정신세계를 이룬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 선사가 입적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마침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회가 마련되어 그곳에서 하루 동안 찻자리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동안 세간에서 볼 수 없었던 선사의 유묵과 더불어 선사와 교유했던 추사와 다산 등의 작품까지도 볼 수 있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주고받은 서찰과 시첩을 보는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격이 있는 만남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해묵은 편지의 행간들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초의는 강진에 유배 온 24년 연상의 다산 정약용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진도의 미술학도 소치 허련을 발굴하여 남도 남종화의 초조 자리에 서게 하였습니다. 한반도 변방 유배지에서 사상과 신분의 차이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시와 학문을 교유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문화의 지성사에서 초의와 추사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동년배인 그들은 우정을 넘어 서로가 흠모하고 연모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랫동안 여행하고 있는 그대가 못내 그리워/ 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네/ 세상의 불국토는 차라리 얻기라도 쉽지만/ 서로 만나 못다 한 정을 누릴 수나 있을까” 초의가 서른두살에 추사를 그리며 쓴 <불국사 회고>라는 시입니다.
“참선하고 차 마시며 지내던 한 해가 또 지나갑니다. 해가 가고 오는 중에도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그사이 천리 먼 길에서 편지가 잘못된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세속에서 사람 사이의 일은 오히려 이것을 빙자하여 멀어진 마음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대에게는 한바탕 웃음거리도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머뭇거려지고 서글퍼짐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추사가 유배지 제주에서 쉰한살에 초의에게 약간의 투정까지 보탠 편지입니다. 주고받은 글들의 곳곳에서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추사와 초의가 아름다운 만남을 평생 키워왔던 토양과 자양분은 차와 함께 학문의 ‘탁마’에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추사가 예순여섯살에 쓴 편지 한 장을 들춰봅니다. “갑자기 돌아오는 인편으로부터 편지와 차포를 받았습니다. 차 향기를 맡으니 곧 눈이 떠지는 것 같습니다. 편지의 유무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대의 차통은 실로 마음이 쓰입니다만, 혼자 좋은 차를 마시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감실의 부처님께서 또 영험한 법률을 베푼 것입니다.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는 지금 차를 마시지 못해 병이 났는데, 지금 차를 마시고 나아졌으니 우스운 일입니다. 인편이 서서 재촉하므로 어두운 눈으로 간신히 몇 자 적습니다. 따뜻한 봄에 해가 길어지면 빨리 와서 <법원주림>과 <종경록>을 읽는 것이 지극히 묘한 일일 것입니다. 이만…. ” 참으로 애틋하고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득과 교육과 주거환경 등 계층 간의 거리가 극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격차사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과 사회 곳곳에서 난무하는 낯뜨거운 ‘언’과 ‘행’을 보면서 ‘인격’이라는 또다른 격차사회를 염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초의와 추사의 편지를 읽어가며 드는 생각 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