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막힌 고속도로 같은 사회
저는 강의를 위해 1년에 1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다닙니다. 그러자니 하루에 보통 6시간 정도를 도로 위에서 보냅니다. 택시 기사님들이 1년에 4만5천 킬로미터 정도를 뛴다는데, 제가 그분들보다 두 배는 더 돌아다니는 셈입니다.
전국을 다니다 보면 도로 위에서 재미있는 일을 참 많이 봅니다. 경부선과 영동선 고속도로는 대부분 4차선입니다. 1차선은 추월차선이고, 2차선은 주행차선입니다. 유럽의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추월한 차는 바로 2차선으로 진입합니다. 뒤따라오는 차량에게 차선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추월하면 곧장 2차선으로 차선을 바꾸어주는 일이 그들한테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 고속도로. 한겨레 자료 사진.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는 보통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추월차선인 1차선을 100킬로미터가 아닌 70킬로미터 정도로 여유롭게 달리면서 차선을 한 번도 바꾸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동차들을 숱하게 봅니다. 학교 다닐 때 1등에 한이 맺힌 사람인지, 고속도로라도 1차선을 누벼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나 봅니다.
문제는 그런 저속 차량 몇 대가 동시에 고속도로를 차지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자동차들 앞으로 길이 뻥 뚫려 있는데도 뒤를 따라가는 자동차는 추월을 못 하게 됩니다. 도로가 꽉 막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 웨이’를 외치며 달리는 자동차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급해? 그러면 당신들이 알아서 돌아가! 나는 차선 안 바꿀 거야.”
1차선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양보 자체를 자존심 상하고 상대방에게 지는 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차를 추월하면 열 받아서 씩씩거리며 뒤따라가서 야구방망이로 앞 유리창을 깨고, 삼단봉으로 내리치고, 비비총으로 쏴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조급증
사회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조급증이라고 합니다.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느라 다른 나라에 한참 뒤처졌던 한국인들은 60년대부터 경제개발이라는 목표 아래 앞뒤 볼 겨를 없이 일만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다른 나라가 10년에 이뤄야 하는 일을 1년 내에 해치워야 했으니 모든 일에 ‘빨리, 빨리!’라는 조급증이 우리 몸에 하나의 DNA처럼 착 달라붙은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미국의 한국인 가게에서 일하는 외국인 종업원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도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뭐든 빨리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이 들다 보니 말만 거칠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삶을 즐기기가 쉽지 않은 일이 된 것입니다.
강의를 위해 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함께 간 신부님과 시내 구경을 나갔습니다. 가는 길에 건널목을 두 걸음 정도 건너갔는데 빨간 신호등이 켜지는 바람에 우리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건널목에 멈춰 있던 자동차가 우리가 물러나는 걸 보고도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먼저 건너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뒤에는 차들이 쭉 서 있고 우리 일행은 빨간불에 걸려 있고, 자기 차는 파란불인데도 사람이 우선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무사히 건너갈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기다렸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하니, 한 달 동안 스페인 콤포스텔라 600킬로미터를 순례했던 청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수많은 순례 행렬이나 아름다운 주변 풍경이 아니라 길을 건너려고만 하면 무조건 멈춰 서는 자동차들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자동차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우리와는 참 다른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도 ‘빨리, 빨리’의 조급증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유치원 놀이터의 자전거
언젠가 EBS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유치원을 비교하는 실험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치원 놀이터에 예쁜 자전거를 한 대씩 갖다놓고 아이들이 그걸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핀란드 유치원에서는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노는 동안 나머지 아이들 열아홉 명이 잠자코 기다렸습니다. 먼저 자전거를 탄 아이가 놀 만큼 놀고 자전거를 제자리에 갖다놓으면 다음 아이가 타는 식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땠을까요? 몰래카메라를 통해 봤더니 스무 명 전부가 자전거에 매달려서 서로 먼저 타려고 싸움을 합니다. 그러다 결국 1시간 내내 한 아이도 제대로 자전거를 타지 못했습니다.
뇌물로 1억이 넘는 돈을 받아놓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습니다. 돈을 준 사람이 양심고백을 했는데도, 그런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고 발뺌을 합니다. 수백 번이나 통화를 했다고 해도 그런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밉니다. 저는 그런 양심 불량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평생 동안 갑질 특권을 누려왔고, 그래서 뇌물도 습관이 되어 별생각 없이 받은 것일 텐데 그런 사소한 일들이 기억에 남을 리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어쩌면 유치원의 자전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양보와 나눔의 미덕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양보를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발 늦게 엘리베이터에 탄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어깨부터 들이미는 아이가 나중에 고속도로 차선을 넘나들며 과속운전을 하는 어른이 됩니다. 조급증이 낳은 병폐입니다.
어느 날,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라켓을 등에 멘 젊은이들 서너 명이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건널목 양쪽 차선에서는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습니다.
» 건널목. 사진 pixabay.com그걸 보고 제가 자동차를 세웠습니다. 차선이 하나라 자연히 제 뒤를 따라오던 차들도 서야 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먼저 건너라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가도 돼요?’ 이런 표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응, 정말 가도 돼!’ 이랬더니 덩치가 산만 한 아이들이 길을 건너다 말고 제 쪽으로 몸을 돌려 90도로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젊은이들도 기분 좋게 건너고, 저도 기분이 좋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 3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짧은 3초를 양보하지 못합니다. 이 3초의 여유를 못 나누어 서로를 무시한 채 쌩쌩 지나쳐버립니다.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여유가 너무 없습니다. 마음의 넉넉함이 없기 때문에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기는 온갖 부작용들이 사건이 되고 뉴스가 되어 오늘도 저녁 뉴스 시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꿀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 단 3초만 참읍시다. 3초의 여유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