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골의 한 노승에게 제자 3명이 있었다. 노승은 산언덕 위에 묘목을 심어놓고 앞으로 3개월 동안 산 위로 수행을 하러 갈 때 각자 힘에 맞게 물을 들고 가서 주라고 했다. 힘깨나 쓰는 첫 번째 제자는 “저는 두 통씩 들고 가겠습니다!”라고 했고, 두 번째 씩씩한 제자는 “저는 물을 가득 채운 큰 물 한 통을 들고 가겠습니다. 그 대신 하루 두 번씩 올라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세 번째 제자는 “제가 들 수 있는 만큼의 양을 하루 한 통씩 매일 산에 올라갈 때마다 들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스승님,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물 들고 산 위에 올라가 봐야 힘만 들고 수행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제자가 일주일 뒤 이렇게 말하자 스승은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게나”라고 답했다.
보름 정도 뒤, 두 번째 제자가 “스승님, 저 역시 못하겠습니다. 물 들고 가는 것이 수행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 그러면 좋을 대로 하게.” 스승이 답했다.
세 번째 제자는 3개월을 훌쩍 지나 1년이 넘어서까지 물을 들고 갔다. 노승이 세 번째 제자를 불렀다. “너는 산 위에 물을 나르면서 얻은 것이 있었느냐?” 제자가 말했다. “산 위에 올라 물을 줄 때 묘목이 자라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훌쩍 커버린 나무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아도 결과는 꼭 있다는 경험을 얻었습니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은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결과이다. 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낙관적 사고는 성공의 모태이다. 크든 작든 자기만큼의 능력이 있다. 처음 주어진 조건은 불공평했지만, 그 이후의 삶은 각자의 노력과 공덕에 따라 차이가 더욱 벌어지게 된다. 명상수행 또한 마찬가지다. 명상이 잘 안되지만 담금질은 계속되고 있다. 길은 걸어간 만큼 목적지는 가까워진다.
호흡관찰은 어렵다. “다만 할 뿐”이라는 무심의 마음으로 호흡명상을 하다 보면 익숙하게 되어 숨이 명확히 포착된다. 그 순간 정신은 고요하게 되고 집중력이 높아져 그 어떤 일을 해도 몰입할 수 있다. 사랑에도, 업무에도 오로지 한마음을 쏟을 수 있다.
호흡관찰의 유의할 점은 호흡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호흡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구경꾼처럼 숨을 쳐다보아야 한다. 숨을 자연스럽게 쉬도록 두어야 한다. 숨은 단지 깨어 있는 것이다. 숨을 안팎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숨을 느끼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알기만 해야 한다. 느끼려 하면 호흡은 무의식적 통제를 낳는다. 그냥 육체가 숨 쉬는 대로 두고 자연스럽게 호흡을 지켜보라.
평소의 숨마저 잘 알아차리려고 하면, 숨을 잘 볼 수 있도록 인위적인 ‘하는 자’가 개입된다. ‘하는 자’는 통제자다. 긴장되고 의식적인 호흡을 만들어낸다. ‘하는 자’는 내려놓고 ‘아는 자’만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마음이 안정되도록 부드러운 언어의 속삭임으로 감싸주면 된다. 호흡을 무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호흡은 고요함의 세계에 도달한다.
가끔 호흡을 인식하는 것이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숨이 없어서가 아니라 민감한 숨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숨을 인식하는 것이 어려워지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점차 명확한 숨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호흡에 유지하고, 호흡에 마음이 깨어 있으면 몸과 마음을 이완하면서 모든 생각과 망상이 고요해져 들숨과 날숨만 알아차리게 된다. 호흡명상 중에 생각이 얽혀들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죽은 시체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은 당연한 것이다. 생각은 알아차리면 지혜요 끊으려면 망상이다. 만일 어떤 중요한 사항이 떠올랐을 때, 보통의 경우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하거나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일지라도 수행 중에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아무 이익이 없는 공상으로 망상만 낳을 뿐이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깊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