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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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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황제 사당’ 만동묘 업은 위세, 힘은 있을 때 아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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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에서 한 밤을 지샌 후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에 ‘만동묘’를 쳤다. ‘만동묘정비’라고 뜬다. 현재 주변을 정비하고 있나? 아무리 IT강국이라고 하지만 ‘정비’라고 가르쳐 줄 만큼 프로그램이 친절하지는 않을 텐데. 한 시간 남짓 지나 목적지에 도착한 후 의문은 풀렸다. 정비는 지방문화재인 정비(庭碑: 뜰에 서있는 비석)였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수난을 면치 못했다. 임진란 때 명나라 지원군의 조선 파병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비슷한 경우인 해인사 사명대사 비석도 땅속에 묻혔다. 여수 진남관 이순신 장군 비석도 경북궁 뜰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없애지 않고 감추기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만동묘정비는 1983년 홍수 때 땅에 묻힌 것이 드러났다. 공주 무릉왕릉도 폭우 때문에 발견되었으니 문화재발굴에는 자연재해가 주는 긍정적 공로도 적지 않은 셈이다. 정비는 묻힐 때 이미 글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도 오리지널이라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다행히 한문으로 된 원문기록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계곡 옆 도로변에 새 비석과 한글번역문을 같이 세웠고 주변건물도 다시 살렸다. 역사복원도 복원이지만 지자체는 관광자원이라는 사실을 더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원군을 보낸 신종(의종 포함)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파병으로 인하여 조선의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었으니 그 성은에 대한 보답이었다. 6.25때 파병을 결정한 외국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어떤 단체의 아이디어도 여기서 나온 모양이다. 만동묘 건립의 외형적 명분과는 달리 실제 내용은 당시 정치적 주류인 노론세력의 근거지였다. 여기를 중심으로 호가호위하는 무리들이 설쳐대면서 엄청 민폐를 끼쳤다고 한다.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이다. 황하는 수만 번 꺾여도 필히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충신의 기개와 절개는 절대로 꺾을 수 없다는 의미도 그 위에 포개졌다. 중국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므로 중간중간 휘돌아 갈지라도 모든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기 때문에 대부분의 하천이 서해로 흘러든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만동묘가 아니라 ‘만서묘(萬西廟)’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문화권을 이동하면서 주체적인 소화능력이 부족하면 이런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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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동묘 계단은 엄청 가팔랐다. 그리고 그 숫자도 만만찮다. 족히 30개는 될 것 같다. 가로도 엄청 길다. 참배할 때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라는 의미였다.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하마비(下馬碑)보다도 한 단계 더 급을 높인 셈이다. 과도한 예의는 비례(非禮)라고 했던가. 흥선대원군이 야인시절에 참배를 왔다. 연로한 나이 때문에 가파른 계단을 혼자 오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았다. 위세등등한 만동묘지기가 황제를 배알하는 예의에 어긋난다면서 엄청 구박했다. 인과는 금방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얼마 후 대원군은 정치적 실세가 되었다. 그 사건 때문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가장 먼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힘은 있을 때 아껴야 하는 법이다.
 맞은편 절벽 위에 있는 암서재(巖棲齋 바위에 깃든 집)는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는 자리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진입로가 보이지 않는다. 계곡을 건너가기에는 너무 깊고 또 폭은 넓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징검다리 삼아 뛰어넘고자 해도 위험해서 포기했다. 식당 주인장, 국립공원 직원 등에게 물어도 도움이 안될 만큼 대충 가르켜 준다. 아니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늘 곁에 있으니까 일부러 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가까울수록 소중함을 잊고 산다더니 정말 그랬다. 커피집 총각에게 물어도 ‘모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관광지에 살면서 커피만 팔지 말고 지역문화도 함께 팔아라”고 한 마디 보탰다. 할 수 없이 혼자 힘으로 눈대중과 발품을 팔아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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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서재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앉아있는 세 칸짜리 소박한 토굴이다. 우암 송시열(1607~1689 노론의 영수)선생이 낙향하여 글을 읽던 서재로 1666년 지었다고 한다. “시냇가 바위 위에 벼랑이 열렸으니 그 사이에 작은 집을 지었다(溪邊石崖闢 作室於其間)”는 시를 남긴 은거지다. 힘들게 찾아 온 만큼 구석구석 샅샅이 살폈다. 뒤편 화강암 벽에는 후손 송씨들이 다녀가면서 새긴 이름자도 보인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화양구곡은 선경 그 자체다. 범상치 않는 위치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골집 구조를 보아하니 선비의 군더더기 없는 삶과 타협할줄 모르는 꼬장꼬장한 근본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대문인 일각문 코앞의 큰 바위 틈 사이에 누군가 테이크아웃용 프라스틱 커피잔을 끼워놓았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쓰레기는 치워야 한다. 한 손에 그것을 쥔 채로 좁고 가파른 자연석으로 된 계단을 다른 한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내려왔다. 하늘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새처럼, 잠깐 동안 다녀간 방문객의 흔적은 뒷사람이라도 지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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