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 오전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고 백남기 농민의 생가에서 노제를 지내기 위해 영정사진이 마을을 지나고 있다. 사진 김봉규 선임기자
같은 날을 살아도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 것이 인생이다. 주검이 들어갈 땅을 파는 손이 있다면, 새 생명을 받아내는 손도 있다. 얄궂어도 그게 인생임을 우린 안다. 지난 토요일이 그랬다. 백남기 농민의 장례가 치러진 애도의 광장은 저녁이 되자 환호 가득한 해방의 광장이 되었다. 그날 광화문 네거리 가득히 출렁이던 촛불을 보며 보성에 있다는 농민의 밀밭이 생각난 것은 왜일까.
지난가을 그의 동료들과 시민들은 초주검이 된 그를 대신해 그 밭을 수확했다. 마지막 수확 이후 비어 있던 그의 밭은 영영 주인을 잃었지만 그 저녁의 광장은 그가 남몰래 키워온 또 하나의 밀밭 같았다. 물대포에 쓰러져 사경을 헤맨 317일, 죽어 땅에 묻히기까지 걸렸던 41일, 일년짜리 어엿한 농사다.
그가 남긴 혈육의 이름을 보아도 그러하다. 도라지, 백두산, 민주화. 모두 그 저녁 광장의 가슴들이 품었을 말들이다. 그러고 보면 꼬박 한생을 들인 농사다. 슬픔과 기쁨, 소멸과 탄생, 겨울과 봄이 실상 얇은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이란 사실을 계절의 순리에 기대 살아온 그는 벌써 알았던 게다. 그는 죽었지만 다시 산 것이고 떠났지만 남은 것이며 쓰러졌지만 수만명의 그로 일어난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려야 했던 지난가을의 추수는 마지막 수확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파종이었던 게다.
그가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만큼 그를 죽음으로 내몬 권력도 나락으로 추락해갔다. 정권의 민낯이 속속 드러날 때마다 병상의 그도 눈에 띄게 쇠락해갔다. 무자격과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나의 운명을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았을 즈음, 권력도 또 권력이 사지로 내몬 그도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끊어지자 이미 허깨비나 다름없는 권력은 그의 몸을 요구했다. 야만이 국가란 이름으로 땅으로 돌아가는 그의 길을 막아섰다. 사람들은 밤을 지새우며 안치실을 지켰다. 국가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 밤을 지새워본 사람이라면 ‘도대체 내 몸은 누구의 소유인가’와 함께 애타게 던졌을 질문이다. 죽어버린 것은 그의 몸이지만 정작 절명한 것은 그 밤의 파수꾼들 가슴속의 ‘국가’였던 것이다. 41일간의 낮과 밤이 결코 빼앗길 수 없었던 것은 주검이 아니라 주검의 주인이 자식의 이름으로 새겨둔 꿈들이었을 것이다. 생명, 평화, 민주. 참된 세상 말이다.
언론이 일제히 옛 주인을 물어뜯었다. 얼굴을 드러낸 배후가 신고 있던 신발의 브랜드와 청와대에 들어간 침대 개수 따위를 앞다퉈 전했다. 추문만 소비될 뿐 그것으로 무너진 세상을 구할 순 없다. 이제 거대한 주검이 치워진 자리에서, 그와 작별한 광장에서 권력의 하야보다 전제되어야 할 마음속 외침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백남기다’란 자각이다. 그가 미처 수확 못한 마지막 파종, 그 나라, 그 세상을 먼저 물어야 할 때다.
장동훈 신부(인천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