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것들을 바라보라
요즘 20대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은 세대입니다. 강의를 마친 늦은 밤시간에 젊은이들이 몰려 있는 대학로를 지날 때가 있는데, 정말 눈뜨고 못 볼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술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싸우기도 하고 길모퉁이에서 꺼이꺼이 울며 토하는 여학생들도 보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가슴속 가득한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풀리겠지만 술에 의지해서 소리치고 우는 방법밖에 모르는 소중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 사진. 픽사베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행복은 ‘상대적인 행복’이 많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해서 이루는 절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남과 비교해서 우월한 위치에 서고,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특권을 누리는 걸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직장을 찾지 못한 대학 졸업자들이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몇 년씩 재수를 하며 입사 공부를 합니다. 고시 패스를 위해 20대를 고스란히 공부에 투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놓치고 있는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하는 동안 보름달이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이 얼마나 찬란한지도 모릅니다. 지구가 얼마나 신비로운 행성인지도 모른 채 매일매일 의미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보면,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몇 년 동안 봉사활동을 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세계를 내 집처럼 돌아다니는 다른 나라 젊은이를 많이 봅니다. 그들은 취직이나 돈 버는 일에 시간과 목숨을 걸지 않고,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더 큰 세상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쫓기듯 젊음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경험하고 도전해볼 만한 일을 찾아 온몸을 던집니다.
인생의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
살아가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 모든 사람을 전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일입니다. 학장 신부님이 강의하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본당의 신부가 되고 나서, 그 본당 교우들 가운데 40퍼센트만 지지와 인정을 해주면 성공한 신부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3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방학에 집에 가면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이 저를 엄청 반겨주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마을 성당에 서면 학생들이 손뼉을 치며 저한테 달려들었습니다. 본당 아주머니들도 저만 보면 하얗게 웃으시며 반겨주셨습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학장 신부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신부가 되고 보니 교우들의 40퍼센트 지지를 받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적에 올라 있는 교우들 중에 40퍼센트 이상 주일미사에 나오는 성당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가 본당 신부를 10년 했는데, 등록된 전체 교우들 중 40퍼센트 이상을 주일미사에 참석시키는 일이 너무너무 어려웠습니다. 교우들의 참석률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저 25퍼센트 남짓입니다. 대한민국 신부님들 대부분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주위사람들 가운데 40퍼센트 이상으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그렇다고 당당하게 대답한다면, 아마도 굉장히 성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40퍼센트한테서 인정을 받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고 칭찬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겠다,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겠다, 출세해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겠다, 이런 욕망 뒤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40퍼센트한테 인정을 받기도 힘든데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살겠다니, 여기에서 인생의 비극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작고 평범한 것일수록 소중하다
1992년, 경기도 철산성당 보좌신부로 임명받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철산성당 교우는 1만 4,000명 남짓이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가르치던 첫날 100명이 모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예비 교우들 앞에 서게 되니 강의할 맛이 났습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시간이 갈수록 예비자 교리를 받는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해서 100명에서 90명, 80명, 나중에는 50명까지 뚝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봉사하시는 교우들이 맛난 음식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보좌신부로 오자마자 최선을 다해 교리를 가르치는데 참석자가 날로 줄어들고 있어 위로해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실망하지 마세요. 수녀님 교리반은 30명밖에 안 남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요한복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힘없고 병든 자들을 살립니다. 예루살렘 성전 옆에는 벳자타 연못이 있는데,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병자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 중 38년 동안 아파서 누워 있던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줍니다.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은 안수기도만으로 자신들을 치유하고 살려낸 예수님에게 열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 호수로 이동하실 때는 계속 가르침을 받고자 5,000명이 열광하며 뒤따라 나섭니다. 순식간에 제자 5,000명이 생긴 것입니다. 복작거리는 이들 무리가 끼니 때가 되니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입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들의 배를 채워줍니다.
병도 고쳐주고 배도 채워주니, 이들은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잠시 이들 무리에서 떨어졌다가 저녁에 나타나시는데, 갈릴래아 호수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경외심을 품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예수님이 이들에게 ‘여러분이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이 말의 참뜻을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말에 무척 거북해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식인종도 아니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먹으라고 하니…….
» 이미지. 픽사베이.
다음 날 이렇게 알아듣기 힘든 말씀을 하니 함께할 수 없다며 예수님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이리저리 다 떠나가고 남은 사람은 겨우 열두 명이었습니다. 눈을 깜빡이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열두 명은 모두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예수님에게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겠느냐?”
예수님이 묻자, 베드로가 그들을 대신해서 말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은 5,000명 가운데 열두 명을 건진 셈입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제가 교우들에게 감히 예수님과 비교하여 이렇게 우스갯소리로 말했습니다.
“자, 여러분! 5,000명 가운데 열두 명을 건진 예수님의 처지가 나은가요, 100명 중에 50명을 건진 제가 나은가요? 많은 분들이 저를 염려하고 있지만 저는 50명이나 남은 분들 덕분에 더욱 힘을 낼 수 있답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오해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나를 이해해주고 인정해줄 것이다.’ 특히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런 착각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일수록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사람이 드물고, 함께하려는 사람이 드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과 기준으로 자신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에게 남은 예비 교우 50명을 제가 소중히 여겼듯이, 당신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당신이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내 삶이 소중해지고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