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박물관 겸 공부방 고반재 관장 종림 스님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종림(72)스님이 낙향해 인생2막을 연다. 1993년 누구도 엄두를 못내던 고려대장경을 비롯한 불서 1100종 한자 5400만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전산화작업을 시작한지 20여년만이다. 거대불사를 얼추 끝내고 그가 내려간 곳은 고향 부근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무위산 자락 장자골이다. 그는 몇년간 공을 들여 책박물관 겸 공부방 고반재(考般齋)를 마련했다. 고반재는 ‘군자가 고반재간에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시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고’란 악기를 두드리며 노는 ‘군자의 즐거움’ 쯤으로 해석된다. 불교의 지혜인 반야를 생각하는 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고반재가 들어선 마을은 한국전쟁때 인민군들도 못찾았을만큼 야트막한 야산에 있으면서도 눈에 뜨이지않은 은둔처다. 함양(咸陽)은 말 그대로 ‘볕좋은 땅’이다. 산과 강, 계곡, 정자가 어우려진 안의는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제1회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대회가 열린 아나키스트의 본고장이다. 볕좋은 오후 시작한 만남은 이념도 조직도 넘어선 ‘아나키’의 고요한 깊은 밤으로 이어졌다.
고반재엔 그가 애초 서울 고려대장경연구소에 자료실을 만들 생각으로 오랫동안 모아온 불경과 고서적과 불상들이 전시돼 있다. 그는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군복무를 마친뒤 출가전 1년 동안 지금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국립도서관에서 파묻혀 지냈다. 토인비와 헤결, 마르크
스, 노·장자에 푹 잠겨 산 시절이었다. 그 때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출가 뒤 이일 저일에 분주한 도반들과 달리 ‘해인사 도서관장’직을 택했던 것도 사서의 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노자도 도서관 관장이었다. 무위산의 책박물관 관장의 모습에서 어쩐지 무위진인의 소요가 어른거린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모든 차별과 우열을 떠나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는 주체적인 자유인을 말한다. 불교계에서 폼을 잡지도 않고, 누구를 차별하지도않고, 어느 누구와도 격의없이 벗할 수 없는 이로선 종림 스님만한 이가 드물다. 그렇기에 고반재는 전시공간이라기보다는 그와 더불어 시간을 잊은 대화를 통해 무위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다. 10명 가량이 동시에 며칠 묵으며 공부모임을 할 수 있는 곳이다.
» 경남 함양군 안의면 무위산 장자골에 들어선 책박물관 고반재. 조현 기자
공부모임을 이끌 종림스님은 애초부터 좌장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꼰대와는 거리가 먼 드분 종교인이다. 한도 화도 없어 보인다. 수백 생전부터 그랬던 것만 같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르며 부러지고 무너지며 겨우겨우 삶의 고개를 넘어가는 세인에게 부러운 품성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님에게도 갈등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20대 30대는 갈등 때문에 미래고 뭐고 다른 데를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무난한 삶을 살긴했지만, ‘현실의 형편 없는 나’와 ‘되고싶은 나’와의 엄청난 괴리 때문에 괴로웠다고 했다. 그는 ‘나 같은 놈은 태어나지말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했단다.
그도 출가 이후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 별짓을 다해봤다. 주력(주문을 외는것), 정신집중, 장자불와(일체 눕지않고 참선하는 것) 등 남이 좋다고 하는 수행도 다 따라해봤다고 한다. “아무리 똑바로 서려고 해도, 도저히 설수가 없었어. 발밑은 늘 경사지고 뒤틀려 있었지.” 발 밑의 갈등 해결이 시급했기에 그는 도반들처럼 ‘이 뭐꼬’,‘뜰 앞의 잣나무’처럼 ‘남의 화두’ 를 들고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선방에서도 치열하게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던 어느날 그는 갈등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정신적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죽을듯 살듯 부여잡고 있었던 문제가 문제가 될수 없고, 갈등을 일으킬 수 없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문제가 해결된게 아니라, 응어리가 ‘해소’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막 한가운데 덩그라니 앉아있었지.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길도 없었지. 해도 달도 없었어.” 정작 그런 상태에서 그는 마음의 갈등이 해소되고,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는 대찰인 전남 해남 대흥사 선원장을 지냈는데, 선방을 나와버렸다. 도반들은 “가만히 앉아있으면 조실을 할텐데”라며 붙잡았지만, 더는 붙잡고 있을 것이 없으니, 앉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 전엔 붙잡고 있던 관념과 이념들들이 부딪혀 바닥이 고르지않았어. 그러니 바로 설수가 없었지. 그런데 그 때부터 이제 어느 자리나 설 자신이 생겼어. 고른 자리면 고른 자리대로, 고르지못한 자리면 그 자리대로 아무데라도 나를 세울 수 있겠더라고. 애초에 좋아하던 곳이 아닌 자리에 서더라도 그때부터는 크게 문제 될게 없었지. 그래서 선방에서 나왔지.”
그가 이 산골에서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공(空)의 입장에 서서 불경과 철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3년전 히말라야가 바라보이는 포카라의 페와호수 건너편 집에 은거하며 3개월간 홀로 이런 사유를 한 즐거움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는 것이다.
“중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게 있다면 공(空)을 세상에 실어다주는거겠지. 이념이나 종교나 자기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0(공)을 실어다주는거야. 사람들은 누구는 1의 관점에서, 누구는 2의 관점에서, 누구는 3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그렇게 한쪽에서밖에 못보면 살아도 산게 아니
야. 죽은 송장이지. 부분만 보는 것이지.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아니라 0에서 보면 저도 편해지고 세상도 편해져. 영에서 시작해 01, 02, 03식으로 보면 1번도 살고, 2번도 살고, 3번도 살수 있어”
고반재엔 인도에서 용수의 중관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와 중관학당을 시작한 신상환 박사가 함께하고 있다. 중관도 유무의 대립을 초월한 ‘공’사상이라고 할수 있다. 갈등이 절로 해소할 치유공간 고반재는 12월3일 오후 2시 개원식을 갖는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