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재석 | jschoi@cnu.ac.kr
요즘 젊은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을 위한 신앙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거나 젊은이들을 위한 적극적인 전도운동이 필요하다고 한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젊은이들을 위한 실현성 있는, 설득력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주견이 분명한 젊은이들
그들이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이 구태의연한 방식이라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고등동물이나 인간의 경우 남녀의 성관계가 없이 새끼나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배울 뿐 아니라, 그들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데, 교회에 오면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가르치니 젊은이들은 이 두 가지 가르침 가운데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구세대의 젊은이들과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의 주견이 뚜렷하다. 연애를 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필이 꽂혀야 한다. 아주 옛날에는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면 얼굴조차 보지 않고 부모의 말에 따라서 결혼했다. 그 다음 세대에서는 맞선을 본 후 자기 마음을 정했다. 지금은 소개를 받는 경우에도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여러 차례 만나서 상대를 알아보고 나서 결정한다. 그래서 요즘 중매가 아주 어렵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연애를 하거나 오랫동안 사귀어 본 다음에 결혼을 결정한다. 그리고 결혼을 한 후에도 서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이혼한다. 이렇게 자기 주견이 분명한 요즘의 젊은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다르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따르려고 한다. 결혼과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부모가 교회를 다니면 자녀들도 응당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처녀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면, 미혼모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경우 약혼한 요셉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속도위반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전 세대에서는 동정녀 탄생이 믿어지지 않아도 어른들이 믿으라고 하면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 보면 그 말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다. 그러나 요즘은 젊은이들의 주견이 분명해서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받아들이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태도를 분명히 한다.
하용조 목사가 연예인 교회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주일 오후 성경공부 시간에 하 목사님이 열정을 다해서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젊은 연예인 하나가 손을 들고 “목사님 농담하지 마세요.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아요!”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하 목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더 상세히 설명했지만, 그 젊은이는 굽히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구봉서 장로가 벌떡 일어나서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야 인마! 마리아의 신랑 요셉도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이 에피소드는 신성종 목사의 『목회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목사의 설명을 거부하는 젊은이가 믿으라는 장로의 우격다짐을 받아들이겠는가? 목사나 교사의 성경 본문에 대한 반복적인 설명도 장로의 강요도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먹혀들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라고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신화적 이야기
나는 일전에 당당뉴스에 올린 글에서 부처의 출생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부처가 어머니의 왼쪽 옆구리로 나왔다는 기록은 신화적 이야기라고 말했다. 부처의 출생에 관한 기록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 대부분은 부처의 출생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예인 교회의 젊은이처럼 요즘 젊은이들은 동정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들이 거부감을 표시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해서 그들이 그 설명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판이다. 그들은 속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나?’ 의심하면서도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심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반복되면 주견이 분명한 요즘 젊은이들은 그들의 상식과 맞지 않는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수긍할 수 있는 새로운 설명을 찾아야 한다.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부처나 예수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단군을 비롯해서 김알지나 박혁거세 등의 탄생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은 사람이 된 곰과 환웅에게서 출생했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김알지가 금궤에서 나왔고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리는 이들의 출생에 대해서 말할 때 단군신
화나 개국신화라고 한다. 부처나 예수님의 출생도 이와 비슷한 설화 혹은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신화적 이야기에서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의 역사적인 정보를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유의 영웅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나 생물학적 사실과 상관없이 그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위대함과 비범함을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설화에서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이야기가 전하려는 신앙적 의미를 중시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이 그 신적인 분을 일상적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신화적인 표현을 빌려서 그 위대한 분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나타내려고 했다. 예수님의 탄생 설화는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려는 방편이다. 예수님의 출생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위대했기 때문에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로 그분의 위대함을 그렸다.
따라서 신화적인 기록은 생물학적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이니까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 설화를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이든 그 설화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신화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신화는 평범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표현하는 특수한 표현양식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화적 이야기를 놓고 그것이 거짓이냐 진실이냐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
때때로 우리는 언어로 우리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자신의 느낌을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는 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에 비유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말한다. 더구나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신적 존재를 표현하는 데에는 일상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로 그 대상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비유, 상징, 혹은 신화적 이야기를 동원한다.
원래 이런 용어들은 문학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문학의 용어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 용어들을 심리학자, 종교학자, 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집단무의식을 설명하면서 원형과 상징, 신화와 종교를 언급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현상학적으로 종교의 역사를 논하면서 신화와 종교의 관계, 종교적 상징의 형태를 중시했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을 공부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에 관해서 말하면서 종교적 언어는 상징의 언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세기 초에 융을 필두로 해서 나오기 시작한 이들의 이론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종교학의 발달에 발맞추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 인문학자들의 이론은 성경에 나오는 신화적 이야기들을 젊은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우선적으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왜 종교적 신앙을 신화적 이야기나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신화나 상징에 대해서 이해하고 나면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배우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문자적 의미대로 젊은이들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전도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의 대부분이 문자적 성경읽기의 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큰 걸림돌이다. 그들이, 하영조 목사처럼, 열심히, 자세히, 반복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젊은이들은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어떻게 아기를 낳겠느냐고 그 가르침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하면, 그 성령이 남자였던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영웅들이나 위대한 인물들의 탄생 설화를 예로 들면서 예수님의 출생도 그런 인물들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이야기를 빌려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교사들이 이야기해 주기 전에 그들은 위대한 인물들의 탄생 설화를 배워서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님은 그 사람들하고는 다른 분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에 대해서 말하듯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문자 그대로 말해주어도 되겠지만, 중학생만 되어도 신화적 이야기를 빌린 표현인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마치면서
교회에서 젊은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젊은이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예전에는 30년이 한 세대라고 했지만, 요즘에는 5년이 한 세대라고 말한다. 그만큼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급격히 바뀌어가고 있다. 요즘 학교교육 현장에서는 상대주의, 다원주의, 열린 사고를 가르치고 소위 열린 교실에서 인지주의나 구성주의적 교육방법을 중시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성경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이런 교육현장의 교육내용이나 교육방법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융, 엘리아데, 틸리히 같은 신화, 종교, 신학을 연구한 인문주의자들의 책도 읽어야 한다.
실제로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교육전도사들이 폭넓은 인문학 지식을 습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대의 인문학과 교육방법을 수용하는 교육 지침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현 상황에서 그런 지침서가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혹시 개인적으로 어느 교사가 동정녀 탄생을 신화적 표현이라고 가르친다면, 당장 당회장에게 불려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젊은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가르칠 것인가, 젊은이들이 납득하기 힘들어 하더라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르칠 것인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자를 택하는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쇠퇴하도록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를 놓고 중대한 결단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육전도사들이나 목사들은 성경과 보수적인 신학서적에 의존하기 때문에, 젊은이들과 호흡을 맞추기 힘들다. 근대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를 호흡하는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도 지도할 수도 없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면서 그들을 교육하는 일과 전도에 힘쓰려는 열의는 바람직하지만, 열의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신학교에서 현대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고 목사들이 보수적인 신학서적뿐 아니라 현대신학 사상이나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읽어야 한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목회자들은 그런 책도 읽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과 대화가 된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의 의식은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외면하고 답답한 이야기만 하면 교인들은 교회를 외면하게 마련이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비행 때문에 교인이 줄어든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 큰 원인은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교인들은 급속히 변하는 사회에 살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있는데, 목사들은 근대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성경 안에 갇혀 있다면, 그렇게 뒤따라가는 지도자가 어떻게 앞서가는 교인들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
이런 미흡한 지도력의 결과가 이미 서양의 교회에서 나타났고 점차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을 과학적인 기록이라고 말하거나 그 창조 설화를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답답해진다. 예수님의 탄생설화를 문자 그대로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가르치면 답답한 나머지, 연예인 교회의 젊은이처럼, 손을 들고 싶어진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묵묵히 참는다. 참다보면 가슴 한 구석에 응어리가 진다. 그 응어리가 커지면 교회를 떠난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면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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