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조계사 뒷켠 골목에서 수십년 동안 운영되던 한정식 집이였다. 인근 관가(官街)혹은 은행가ㆍ회사에서 알만한 이는 모두 아는 그래서‘김영란 법(공직자는 3만원 이상 가격의 식사대접 할 수 없다는 법)’으로 문을 닫는 것이 뉴스가 될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다. 한동안 내부공사를 하더니 얼마 후 월남국수집이 들어섰다. 들리는 말로는 핏줄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한식당을 운영하던 솜씨였기에 가마솥에서 우려내던 그집만의 노하우로 만든 국물에 국수를 말아주었다. 어떤 음식이건 국물은 거의 먹지않는 식성 임에도 불구하고 남기지 않을만큼 그 맛이 깊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한다면 월남국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모양이나 그릇 등은 비슷했지만 국물소스는 완전히‘조선화’된 우리국수였기 때문이다. 월남국수 특유의 향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전통 장터국수도 아니다. 월남국수가 이 땅에 들어와서 몇십년만에 완전히 토착화된 퓨전국수라고나 할까.
국수는 본래 귀한 음식이다. 밀농사를 직접 짓고 수확 후 맷돌로 갈아야 하는 시절에는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잔치날 혹은 집안의 명절에나 내놓을 수 있는 알고보면‘외부용’이었다. 그리고 생일날 국수는 장수를 상징하는 등 많은 스토리텔링도 뒤따랐다. 그래서“국수 언제 먹여주나?”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육이오 이후 구호물품인 밀가루가 대량으로 시중에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수는 언제나 누구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누구에게나 언제나 그냥“국수나 한 그릇 하지!”로 그 말이 바뀌었다.
오래 다니던 단골음식점이 갑자기 없어지는 황당함을 서너달 전에 또 겪었다. 이건 대략난감을 넘어 거의 스트레스 수준이다. 가깝기 때문에 늘 편안한 마음으로 다니던 월남국수집인 까닭이다. 산중에서 스님들이 오면 대접하기도 그만이다. 그리고 때를 놓쳐 부담없이 혼자 한 끼를 해결하기에도 더없이 편안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결국 사람이다. 주인장의 화사한 미소와 친절도 빼놓을 수 없는 고명처럼 국수 위에 올려졌다. 종로를 떠나 속리산과 가야산에 머물 때도 이 집 국수가 가끔 생각날 정도였다. 이 집을 통하여 비로소 월남국수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없어졌다.
할 수 없이 다시 주변을 뒤졌다.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찾아간 곳이 인사동 5번길에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은 이미 길들여진 그 맛은 아니다. 큰틀은 비슷하지만 집집마다 미세한 맛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족도가 그런대로 괜찮은지라 기회가 되면 가끔 들른다. 신호등을 한번 받아야 하는 큰길을 지나 십여분 이상 걸어야 한다. 지척이 천리라고 했던가. 결국 가까운 곳 만큼 자주 갈 수는 없었다. 덤으로 근처‘붕어빵’집도 참새방안간처럼 들린다. 내가 알고있는 한 가장 비싼 붕어빵이다. 직접 농사지은 밀을 맷돌로 갈았나?
이래저래 월남국수와의 인연도 십여년을 훌쩍 넘겼다. 원문을 확인하는 습관 아닌 습관은 국수세계에도 그대로 전이된다. 언제부턴가 오리지널 월남국수를 반드시 확인하고야 말겠다고 벼르게 되었다. 드디어 지난 해(2016년) 12월 초순에 기회가 왔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월남국수를 먹었다. 베트남에 도착하여 처음 간 곳이 월남국수집이였다. 종로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느억맘 국수’라고 한다. 오이냉국 같은 시큼달콤한 뜨거운 국물에 말아 먹을 수 있도록 면을 따로 내주었다. 본토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는지 맛은 별로였다. 한국에서 가장 즐겨 먹는“덜 맵게 해주세요”라고 따로 주문을 넣는 똠얌국수집은 일정이 끝날때까지 결국 들리지 못했다. 여행사는 짜여진 일정대로 정해진 식당만 갔기 때문이다.
2017년 새해에는‘누들로드’ 따라가듯 월남국수를 찾아가는 여행자리가 있다면 꼭 끼여야겠다. 그리하여 지역민이 아끼고 추천하는 ‘미쉐린 별’이 전혀 부럽지 않는 동네 월남국수집을 찾아갈 수 있는 인연을 기대한다. 꼭 해야할 버킷 리스트에 한 항목 더 추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