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오늘날 독일의 라인라이트 인근 네안데 계곡에서 고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약30만 년 전에 출현하여 약3만 년 전에 멸종된 인류의 한 종으로서, 고인류학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라 명명되고 있다. 이들의 화석이 발견된 곳이 주로 무덤이었는데, 무덤 속에서 꽃다발로 장식한 흔적이나 짐승 뼈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곤 했다. 이런 유적은 멀리 독일의 네안데르탈인이 아니어도 우리나라 청주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1976년 충북대학교 이융조 고고학 교수가 청주 가덕면 두루봉 석회석 광산에서 발견한 어린이 유골 주변에서, 꽃가루나 뼈로 만든 예술품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훗날 이 유적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한흥문의광산’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로 명명했는데, ’흥수아이‘가 살던 시대가 적어도 5만 년 내지 10만 년 전이라 보고 있다.
이들 네안데르탈인이나 '흥수아이'의 당시 매장풍습에서 꽃다발로 장식하고, 죽은 이들이 평소에 사용하거나 소중하게 간직했던 물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구려 적석총에 비해 그 규모가 다를 뿐 죽은 이들의 영생을 기원하는 매장풍습은 큰 차이가 없었다. 네안데르탈인과 흥수아이가 거의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인류의 종이 다르고 독일과 한반도라는 지리적 거리가 아주 멀음에도 비슷한 매장풍습을 한 것을 보면, 아주 먼 옛날부터 인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영생을 인식했으리라 보인다.
'영생'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 삶의 연속성'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현세와 완전단절'을 의미하는 죽음이 어떻게 '삶의 연속성'으로 이어진다고 믿었을까? 고대 인류에게 죽음이란 무엇이었을까? 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현세와 완전히 단절'이라는 죽음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자신의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에 겨워 삶이 밝다가도 절망의 심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라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당황을 넘어 비통에 빠져 무기력을 실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단절이라는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영생은 죽음의 단절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사항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눈에는 내세는 실재의 세상이다. 약138억 년 전 '빅뱅'이후,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는데 약100억 년이나 걸렸다. 다시 이 생명에서 정신(인간)이 출현하는데 약40억 년이 걸렸다. 따라서 생명은 물질세계의 내세였으며, 정신(인간)은 생명의 내세였다. 또 다시 40억 년 후, 정신(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한번 해보라. 바로 우리 인류의 내세를 말이다. 고대인들로부터 인식해온 내세(영생)가 상상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재였다.
그러나 과학이 없던(모르는) 시대에 죽음은 '현세의 완전단절'로서 '죽은 시체의 연속성'으로 인식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내세(영생)를 인식해온, 고대인들은 단절(죽음)과 연속성(영생)을 어떻게 하나로 인식했을까? 고대인들이 인식한 죽음은 '완전한 현세의 단절'이외에 어떤 현상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생이란 '죽은 시체의 다른 존재'로 인식한 영혼이 머무는 저승이 그들의 내세였다. 사실 죽음이란 생물학 영역이지 철학이나 신앙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이 없었던(모르던) 시대에서 죽음과 영생에 관한 정의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코스모스는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없어 자신의 정보를 씨앗으로 남기고 개체는 소멸되고 만다. 이듬해 따뜻한 봄 날, 씨앗은 싹이 터서 한 여름 태양빛에 무럭무럭 자라 파란 가을 하늘아래 다시 울긋불긋 코스모스 꽃을 피운다. 생물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무생물에서는 예를 들면, 우라늄은 우라늄을 낳을 수 없어 토륨이나 플루토늄으로 붕괴되어 결국 납으로 변화되어 사라진다. 무기질은 개체로 존속되는 '불멸성'이 불가능하다. 생물은 자신의 정보를 DNA에 담아 삶의 연속성을 이어간다. 이 DNA 정보를 우리는 '생명'이라고 하는데 '생명'은 물질이 획득한 '불멸성'이다. 결국 생물은 무생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식을 자신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은 생물이 아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인격은 자식에게 생물유전이 되지 않고 사회성으로만 유전된다. 따라서 나와 자식은 독립된 개체이다. 약40억 년 전 생명은 무기질에서 독립된 개체가 되어 '생명은 생명을 통해 연속성'을 이어왔다. 다시 약40억 년 후, 생명이 아닌 정신으로 연속성을 이어가는 인류가 출현했다. 생명이 생물의 정보라면, 정신은 인간의 정보로서 물질도 생명도 아닌 제3의 물질정보이다. 옛날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이 '정신정보'를 영혼이라 인식하고 있다.
고대 이후, 오리엔트시대 최초로 부활사상이 출현했는데 이집트의 '미라를 통한 부활사상'과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의 프라쇼케레티(Frashokereti)라는 2단계 종말론에 부활사상이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내세관은 '구세주 메시아'를 통해 '완성된 하느님 나라'로 구원되는 현세로 연속되는 구원관으로서, 저승에서 삶을 영위하는 영혼이나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약1천 년 후 예수의 부활사건이 있었다. 이집트, 조로아스터교, 예수의 부활사상의 공통점은 저승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현세에서 부활이다. 고대인들이 인식한 영생이 '저승에서 영혼의 영원한 삶'인 반면, 부활사상은 영생의 종착점이 저승이 아니라 보다 완성된 현세라는데 있다. 이집트나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은 죽음이 되살아나 인간의 삶이 현세로 연속된다는 죽음과 영생에 관한 신앙언어였다.
아예 부활사상이 없던 히브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사건은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한 획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3일 만에 부활'이란 '온전히 생물의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부활은 '인간은 생명이 아니라 정신의 연속성'으로서, 인간의 '정신정보'가 '새로운 인류를 출현 시킨다'는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이집트나 조로아스터교, 히브리인들은 '인간은 생물이다'라는 의식 수준이었지만, 예수의 부활사건은 '인간은 생물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6-50) 말씀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었다.
당시 과학을 모르던 고대인들과 오리엔트시대 사람들이 '생명과 정신의 불멸성'이나 '생명과 정신의 연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신앙언어(영혼, 저승, 천당과 지옥, 부활, 내세)를 통해 영생을 이해하고 표현했었다. 고대인들이나, 오리엔트시대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나, 영생관이 다르다고 내세의 실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생관이냐에 따라 죽음과 부활과 내세관이 인간의 의식수준에 따라 개체성에서 공유성으로 갈라진다. 따라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 문명의 수준이 달라진다. '공유성'이란 '정적인 세계관'에서는 어느 하나를 여럿이 이용한다는 의미이지만, '동적인 세계관'에서는 여럿이 하나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동적인 세계관'에서 인류의 '공유성'을 강조한 가르침이었으며, 부활은 당시 제자들이 장소개념으로 인식해온 저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영생은 '저승에서 영원한 삶'이라는 신앙을 선포하고 있다. "저 멀리, 죽어서도 있다고 믿어야 위로받을 수 있는데 내세는 연속된 현세라고 하니..... 앞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어느 신자의 독백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실상을 보는 듯, 영생이 자신들만의 독점물인 냥 허무한 신기루만을 설교하고 있다. 인류가 인식해온 영생에 관해서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답을 주는 종교가 없는 이유가, 과학이라는 실증학문이 없었던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물학을 통해 '생명의 불멸성'과 '생명의 연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죽음과 연관된 신앙언어가 보다 명확하게 인식되리라 믿는다. '생물학에서 철학을 인식하라'는 샤르댕의 말씀 속에 보다 명확한 죽음과 내세에 관한 정의가 내려지리라 믿는다. 영혼이란 '죽은 시체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자의 '정신정보'이다. 오늘날 물질, 생명, 정신이 형성되는 하나의 연속된 정보(말씀)로 인식한 사람들은 예수. 복음사가 요한, 유물론자들 그리고 '떼이야르 드 샤르댕'뿐이다. 만약 누구든지 생명은 물질이 획득한 '불멸성'임을 안다면, 정신은 생명이 획득한 '불멸성'임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곳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마태 22: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