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언제부턴가 장거리 운전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않는 혼자만의 자유로움이 좋아 ‘질주본능(몇년 전 유행한 자동차 판매광고용 문구)’을 구가하며 달리는 것이 행복했다.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편하게 여겨 기피했던 대중교통을 장거리 이동시에는 자연스럽게 이용하게 된다. 그것은 또다른 행복감을 준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그 사이에 졸리면 눈을 감기도 하고, 무료하면 신문을 뒤적인다. 그것마저도 시들해지면 텅 빈듯한 눈빛으로 창밖을 가만히 바라볼 수도 있다. 이제 세월 탓인지 여유로운 이동이 더 좋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스님의 베스터셀러 책이름)’의 경지는 아니지만 달리면서도 보이는 것들이 차창너머 가득했다. 멀리 모내기가 끝난 들판의 질서정연한 싱그런 어린 모들과 그 아래 바닥에는 맑은 논물이 가득 고여 호수처럼 반짝인다. 가까이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우우웅”하고 고요를 깨뜨리는 핸드폰의 진동음 신호가 들렸다. 화면에는 발신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행복하세요’라는 문자만 계속 뜬다. 등록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받아도 별로 행복할 것 같지않다는 느낌이 수초간 지속된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받았다. 전화번호가 바뀐 오래된 지인 그러면서도 다소 부담스런 이 였다. 열차 안이라고 양해를 구한 후 용건을 확인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에 가장 자주 뜨는 문자가 ‘행복하세요’ 였다. 처음에는 생뚱맞게 느껴졌다. 여러번 반복경험 후에는 ‘이 시대의 새로운 유행어인가 보다’하고 넘어간다. 발신자 의지가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통신사의 일방적인 선택문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을 위해 ‘행복하세요’ 라고 축원하는 것은 설사 입에 발린 상업적인 건조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아름다운 일이다.
한 때는 ‘부자되세요’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부(富)가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인 까닭에 공감어가 된 것이다. 수산스님의 행복론(김석종 《마음살림》)은 그것과 달랐다. ‘입으로는 말을 줄이고 위장에는 밥을 줄이고 마음에는 욕심을 줄이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결국 욕심을 줄이라는 말씀이었다. 욕심이란 성취하면 할수록 더 큰 욕심으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본래 욕심이란 놈은 만족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란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알고보면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欲之足)의 지혜가 행복의 기술인 것이다. 더 바랄게 없다는 천상세계인 도솔지족천(兜率知足天)은 무엇이건 바라는 것은 다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욕심을 비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일 게다. 부자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필요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도 부자이긴 마찬가지다. 그 명칭은 해인사에서 암자이름이 되었다. 지족암이다. 예전에는 먹을게 제대로 없어 별명이 부족암(不足庵)이었다고 오래 전에 열반하신 극락전의 어떤 노장님이 일러주셨다. 지족도솔암이란 편액이 한쪽 켠에 걸려 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소욕지족할줄 알기에 여기가 바로 땅 위의 도솔천이란 의미였다.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방송멘트가 나온다. 아직도 목적지는 온 만큼 더 가야 한다. 주간신문을 펼쳤다. ‘해야 할 일’과 ‘하고싶은 일’에 대한 제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갑자기 내 삶이 반추된 까닭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승가라는 것이 단체생활을 전제로 한 것이였다. 그러다보니 이제까지 나에게 주어진 ‘해야할 일’만 하고 살았다는 그래서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그래! 나도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거야. 그러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참으로 행복했다. 비록 찰라간 이었지만.
그런데 이내 그 꼬리를 물고 우문이 뒤따라 왔다. ‘해야할 일’은 알겠는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도대체 뭐였지? 그리고 냉정하게 살펴보건데 해야 할 그 일이 하고 싶은 그 일을 방해한 적이 있었던가? 괜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나누는 순간 그것이 불행의 시작은 아닐까?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구체적인 일상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 하고 싶은 일도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생기는 법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이 공식을 기차여행 속에 조심스럽게 대입해 보았다. 있던 자리가 해야할 일의 영역이라면 가고있는 자리는 하고 싶은 일의 영역이다. 다람쥐 체바퀴처럼 돌아가는 공동체 생활의 일상이 늘 해야 할 일이라면 가끔 이렇게 기차를 타고 볼일보려 떠나는 일탈이 하고 싶은 일인 셈이다.
쓸데없이 한 생각 일으키면 만갈래의 다른 생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한 줄기 물길이 만 갈래 파도를 만든(일파재동만파수一派纔動萬派隨) 격이다. 몸뚱아리를 가지고 살고있는 이상 해야 할 일을 안할 것도 아니면서 괜히 하고 싶은 일만 찾다보면 해야 할 일 조차도 게을리하게 되어 결국 불행을 자초하기 마련인 것이다.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딱 제 자리라고 여긴다면 그것도 행복의 한 방편은 되겠다.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는데 결국 내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왔다.
신문의 하단에는 금주의 베스트셀러가 나열되어 있다. 1위는 《꾸베씨의 행복여행》이었다. 내용보다는 ‘행복’이라는 제목이 독자 선택권에 한 몫을 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했다.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슬픔’을 더 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덜 완전한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이를 바꾸어서 말한다면 행복이란 덜완전한 느낌에서 더완전한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래나. 하지만 수도승처럼 혼자사는 것도 아닌 일반인들에게 슬픔과 행복을 어찌 심리적인 면으로만 전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종착역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세상사람 모두가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적당한 물질적 여유와 심리적 안정 그리고 주변의 평화가 더불어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