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아, 어미 소의 모성을 쥐어짜지 마라
까마득히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라 저자가 누구였던지 제목이 뭐였는지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거기 쓰인 비유 한 대목은 너무 생생하고 선명해서 이따금 써먹곤 한다.
17세기 후반, 인도의 데칸 남서부 지역에서 일어나 근 150년 동안 온 인도를 휘저었던 마라타(Maratha) 왕국의 지배자들에 관한 소설이었다. 전성기에는 대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남쪽 타밀나두에서 서쪽 파키스탄, 동으로 벵골 지역까지 지배하기도 했지만 끝내 영국군에 패하고, 폐위된 왕이 있었다.
그는 본거지였던 푸네에서 멀리 떨어진 갠지스 강변의 칸푸르에 유배되어 영국의 연금으로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이 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주인공인 바지 라오 2세(Baji Rao II)가 정치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적당히 살을 붙여 풀면 이렇다.
“한 농부가 곰곰 생각했지. ‘어떻게 하면 어미 소의 젖이 멎지 않게 해서 주야장천 짜 먹을 수 있을까?’ 하고. 묘책이 떠올랐어. 송아지 가죽에 지푸라기를 욱여넣어 어미 소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워둔 거야. 그랬더니 이 미련한 어미는 먼발치에 서 있는 죽은 제 새끼를 바라보며 우걱우걱 되새김질하면서 끊임없이 젖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겠어! 기발하지? 국가 혹은 군주라는 게 실은 그 송아지 박제에 불과한 거야. 그걸 바라보고 젖을 만들어 내는 어미 소는 백성들이고! 젖 짜는 농부는 곧 우리네 크샤트리아 칼잡이들임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고 이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영 입속이 떨떠름하고 메슥거린다. 아마 노자(老子)도 이런 일을 겪고 겪으면서 그 주옥같은 말씀을 남기시지 않았을까? 그리고 수많은 아저씨, 형님들의 배알을 뒤틀어 아나키스트가 되게 했던 것도 지금 이런 기분 때문이었을까? 이 수상한 시절에 저 죽은 송아지가 허수아비 나라님을, 그리고 젖 짜는 자는 누구, 누구를 연상케 한다며 이니셜이라도 썼다가는 미련한 소 떼들이 온갖 패악질에 악다구니를 쏟아낼 게 분명하니 각설하고….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애국심, 조국, 민주주의 등등이 저 죽은 송아지일 뿐이고,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모여든 군중이 교활한 수탈꾼들이 던져준 검부저기로 젖을 만들어 바치는 우매한 소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저 비유는 비유일 뿐이라고 넘기기에는 우리네 살림살이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말에도 맛이 있다면 착취, 수탈 등의 단어는 늘 쓰고 찝찔하다. 그런 말을 우물거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깨인 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박제 송아지를 거부한다. 스스로 풀밭을 찾고, 우리의 기름진 젖으로 키운 송아지는 맑고 초롱한 눈빛으로 튼튼하게 자라야 한다. 그렇게 자란 소가 다시 그대에게 젖을 베풀 것이다.”
재연 스님(선운사 승가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