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짧은 인생의 열흘, 또래의 사랑이 ‘기적’
혜은이와 혜진이 이야기
가끔 호스피스병동에 아이들이 입원하는 경우가 있다. 몇년 전 이맘때쯤 갓 중학교 2학년이 된 혜은이가 입원했다.
몇달 전부터 계속 ‘팔과 다리가 아프다’, ‘학교 가기 싫다’고 징징거릴 때마다 부모님들은 그저 요즘 흔히 말하는 ‘중2병이다’, ‘이제 사춘기가 왔나 보다’ 하며 무심결에 지나쳤다. 아픔을 호소할 때마다 파스 붙여주고 찜질해주면서 ‘키 크려고 성장통’을 앓고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 가보니 ‘골육종암’이었다. 그것도 어떤 치료조차 해볼 수 없는 말기 상태였다.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끔찍했을까? 혜은이는 얼마나 무섭고 아프고 화가 났을까? 밥도 안 먹고 늘 병실에서 울기만 하고 집어 던지고 화를 내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뿐 아니라 심지어 간호사, 의사까지도 곁에 못 오게 했다. 눈을 한번 감으면 다시는 새로운 날을 맞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부릅뜬 채 버텨서 수면제도 그 아이를 편안하게 하지 못했다.
*청년 암환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영화 <안녕, 헤이즐> 중에서
모든 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주변 중학교에서 폭력 사건에 휘말려 정학을 받은 혜진이가 두 주 동안 자원봉사를 오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아이에게 적당히 시킬 만한 일이 없어서 그냥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따라다니면서 각 병실의 화장실 휴지통을 비우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혜은이 방에 들어간 혜진이가 자기 또래의 아이를 보더니 다짜고짜로 ‘야, 너 몇학년이야?’라고 물었다. 혜은이가 ‘나, 중학교 2학년’ 그러자 혜진이가 ‘나는 중3이야, 내가 언니네. 말 놓는다?’
*다정한 친구 사이. 영화 <써니> 중에서
순식간에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는데 그다음부터 더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던 혜은이가 혜진이와 금방 친해지더니 같이 게임도 하고 밥도 잘 먹고 함께 침대 위에서 만화책을 보면서 깔깔대기도 하고, 둘이 아이돌 스타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괴성을 지르고 꽃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진통제도 효과를 발휘해 고통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밤에 잠도 잘 자더니 열흘쯤 뒤에 엄마, 아빠에게 아주 많은, 그리고 예쁜 인사말들을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짧은 인생의 열흘을 함께해준 혜진이 언니에게도 아끼던 인형 하나를 남겨둔 채.
호스피스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고 완성시켜주는 것은 의료진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선입견 없이 다가가는 사랑이라는 것을. 늘 그렇듯이 혜진이와 혜은이가 나의 스승이며 교재였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달았다.
손영순 까리따스 수녀(마리아의 작은 자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