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의 시
이종태 / 광양시 농사꾼
*영화 <영원과 하루> 중에서
칠순이 되니 벗과 지인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종종 접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만남의 대화에서 죽음이 화두가 되곤 한다. 공통된 의견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마지막 자존을 지키며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최소한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소위 죽을 복을 희망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죽음임을 왜 모르겠는가. 북미 인디언의 말처럼 ‘너무나 당연한 먹이사슬의 순환’임도 익히 알고 있다.
인간 스스로는 유일하게 생명연장만은 진화하지 않았다고 하나, 의술의 발전은 병원과 관광지 등이 노인들로 넘쳐나게 하고 있다. 건강에 대한 나의 희망과 타인의 늙은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 또한 사실이다. 사마천은 죽음은 죽음을 맞는 당사자보다 죽음을 지켜보고, 전해들은 사람들에 의해 인식되고, 이해되고, 해석되고 있다며, “사람의 죽음은 태산처럼 무거울 수도 있고, 깃털처럼 가벼울 수도 있다”는 소중한 말을 남겼다. 죽음을 자주 불러내어 친숙해져야 옳은지 가능하면 잊고 살아야 하는지도 짐작이 서지 않는 대목 중 하나다.
퇴직 후 750여평의 논에서 50여 작물을 기르며 삽과 괭이 등 재래식 농기구로만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누구보다 친해졌고 그 정직함과 포용력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고된 하루가 숙면을 가져오듯 일생을 열심히 살다 보면 죽음이라는 가장 큰 잠 또한 매일 밤 잠의 연장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는 매 순간 이러한 죽음을 꿈꾸어보며 ‘죽음의 서’라고 이름 지어 보았다.
나에게는 소중한 꿈 하나 있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까?
사랑하는 처자식 지켜보는 앞. 내 인생 마지막 자존 지키며.
내 생애 최고의 미소 보이며. 최선을 다해온 삶이었노라!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붙들려 가지 않고 찾아간다고.
정말로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당당히 가슴 펴고 떠나간다고.
이제는 푹 쉬어도 여한 없다고. 제발 부탁하니 깨우지 말라고.
인간이 출생의 고통을 모르는 것으로 보아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죽음을 맞는 지혜와 방법도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진화시키며 우리가 모르는 곳에 감추어 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불편과 생경함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기 위해 나는 요즘 위내시경도 마취 없이 받고, 치과에도 망설임 없이 가고 있다.
농사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라고 일러준다. 죽음이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어렵게 말하지 않고, 그저 누구와 경쟁하지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시기할 필요도 없이 살라고 말한다.
*이 글은 한겨레신문 2017년 1월31일자 '왜냐면'(시민사회 토론 공간)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7806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