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트레킹은 하루 평균 고도 400~800미터씩 올라간다. 고산병엔 장사 없다. 나 등엔 배낭 말고 염증과 통증까지 지고 간다. 그래서 ‘3계’를 정했다. 첫째 무리 안 할 것, 둘째 무리 말것, 셋째 절대 무리 안 할 것.
그럼에도 일반루트를 벗어나면 샹그릴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어김없이 고행을 택한다. 수직 산을 통째로 넘는 갸루행이 그랬다. 설산 경관이 장엄한 곳이다.
» 갸루를 둘러싸고 있는 설산
하지만 가파른 낭떠러지에 겨우 서 있는 마을을 어서 벗어나고 싶다. 고갯길에서 땀을 훔칠 때였다.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아가씨가 겸연쩍게 웃으며 옆에 앉는다. 커피와 차를 팔고 오는 길이란다. 왜 대처로 안 나가냐고 물으니, 노부모를 두고 혼자 갈 수 없단다. 효녀 심청이다. “이곳이 무섭지 않으냐”니, “왜 무섭냐”고 되묻는다. 광대에겐 평평한 아수라보다 외줄 위가 더 익숙한 것인가.
마낭은 해발 4천~5천미터 고지 적응을 위해 쉬는 마을이다. 그런데 티베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자인 밀라레파가 10세기에 수행한 동굴이 있다 했다. 밀라레파는 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백부가 모든 재산을 강탈해 가자 흑마술을 배워 친척을 몰살한다. 그 뒤 히말라야로 와 수행하며 참회하고 불보살이 된다.
히말라야의 불교 사원에는 어디나 희한한 부처 그림들이 있다. 불처럼 분노하거나 섹스하는 부처다. 왜 그럴까.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에너지가 분노와 애욕이다. 분노와 애욕에 집착하지도 금기시하지도 않고, 그 불타는 에너지를 깨달음과 자비의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게 티베트 불교의 매력이다.
왕복 세시간 걸린다던 동굴은 서너시간을 넘게 가도 나오지 않는다. 가는 내내 사람 한명이 없다. 밥 딜런의 노래처럼 얼마나 오래 걸어야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일까. 인간이 덜되면 나처럼 오랜 수고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벼랑 끝에 있는 밀라레파 동굴
숲과 고개를 몇개나 넘자 폐사터다. 자칫 미끄러지면 천길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길 아닌 길을 기어오른다. 벼랑 끝에 동굴이 있다. 밀라레파가 앉아 명상하느라 엉덩이가 말밥굽처럼 딱딱해졌다는 곳이다. 밀라레파는 하필 이 백척간두에서 명상한 것인가.
분노한 바람이 총알처럼 뺨을 때린다. <태백산맥>의 빨치산 하대치처럼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바위 뒤에 잠시 몸을 숨겨 마지막 담배를 피울 때의 평화가 이런 것인가. 서늘한 바람을 온마음으로 마주한다. 태풍의 핵은 비어 있던가. 짠내 나는 땀이 영롱한 감로수처럼 입가로 스며들고, 통증은 환희가 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