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아속
인도 오로빌
5.자기로 살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
미국 브루더호프
6.돈 없이 최고급리조트에서 살아보기
7.공부보다 청소와 요리에 더 열심인 아이
8.뒷담화 말고 앞에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일본 애즈원
9.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일본 야마기시
11.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 곳
*오로빌 마트리만디르 앞 정원의 반얀트리
신화와 소설과 꿈…. 이들의 공통점은 허구라는 것이다. 인간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만들어낸 가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가는 게 인간의 역사다.
남인도 첸나이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푸두체리(퐁디셰리)의 오로빌 또한 그렇다. 오로빌은 25㎢, 750여만평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마을이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시다. 황무지에 대규모 공동체를 일군 것만으로 신화랄 수는 없다. 외관만 보자면 서울 강남이 천지개벽한 것과 비교할 때 이곳은 변화랄 게 없다. 1968년 첫 삽을 뜬 지 50년이 다 됐지만, 비가 오면 통행조차 어려울 만큼 질척거리는 길들이 적지 않으니, 발전 속도는 지렁이처럼 늦다. 45개국에서 온 2500명이 한곳에 모여 산다는 것도 그것만으로 경이롭다고 할 수 없다. 미국 맨해튼엔 전세계에서 온 160여만명이 모여 있으니 말이다.
오로빌에서 부나 고도성장을 바라는 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마더’로 불리는 프랑스 출신 설립자 미라 알파사(1878~1973)는 “우리는 다른 이들이 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고 했다.
*마트리만디르
‘오로빌의 영혼’이라는 ‘마트리만디르’(어머니의 전당)를 보면, 이들의 존재 방식이 보인다. 1971년에 시작돼 최근에야 완성된 이 명상센터는 오로빌리언들의 성소다. 지구상에서 가장 볼만한 건축물로도 꼽히는 명소를 너무 쉽게 접하면 그 가치를 모른다고 여긴 때문일까. 방문자센터에서 예약하고, 당일 함께 모여 미리 영상물을 관람한 뒤 버스를 타고 가서도 침묵을 지키며 줄 서 들어가야 했다.
오로빌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 아우로빈도(오로빈도·1872~1950)는 “인간이 아직 이르지 못했으나 이르러야 할 어떤 경지가 있다”고 했다. 마티리만디르는 그 영적 진화를 위해 발사대 위에 있는 우주선 같다.
내부엔 어떤 종교적 성소에서도 보기 어려울 만큼 경건하게 서 있는 오로빌리언들이 지키고 있다. 뇌 속을 걸어 마음의 심연으로 걸어가는 듯한 중앙엔 지름 70㎝의 거대한 크리스털이 있다. 어둠 속에서 오직 그 수정 위로만 한줄기 빛이 내려온다. 방문자들은 고요히 앉아 침묵한다. 약육강식 속에서 생존을 위한 악다구니 속에서 빼앗긴 평화를 되찾아 영적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침묵이다.
*마트리만디르 내부의 중앙 명상홀
마트리만디르을 중심으로 산업구역, 주거구역, 문화구역, 국제구역으로 뻗어나간 오로빌은 마치 ‘신시’(神市)를 연상케 했다. ‘오로빌’은 ‘동트는 새벽’이란 뜻의 프랑스어(aurore)와 시(ville)의 조합이다. 마더의 멘토이자 영적 파트너였던 오로빈도의 ‘오로’와 시(市)의 조합으로도 읽힌다.
오로빈도는 인도 캘커타(현 콜카타)에서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벵갈루루(방갈로르)국립대학 초대 학장을 지냈다. 인도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국사범으로 체포돼 감옥에서 깊은 영적 체험을 했다. 그는 그 체험을 토대로 <사비트리>란 대서사시를 썼다. 또 몸운동 위주의 아사나를 넘어 전인적인 영적 변화를 위한 ‘통합요가’(integral yoga)를 주창했다.
오로빌엔 이를 기리는 ‘사비트리바반’이 2004년 지어졌다. 마트리만디르와 함께 오로빌의 양대 영적 장소로 꼽히는 이곳에서 ‘통합요가 이론과 명상 실습 워크숍’에 참가했다. 이론을 듣고 잔디밭에 나가 옆사람과 짝을 지어 눈을 감고 공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10분가량이 지나자 상대가 공을 건네줄 때 내가 손을 내밀어 공을 척척 받아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이심전심이 된 것이다.
*명상워크숍
오로빈도는 38살에 아내와 헤어져 퐁디셰리에 은거했다. 프랑스령 퐁디셰리에 1920년부터 머물던 프랑스 국적 유대인 마더는 오로빈도를 만난 뒤 그를 멘토로 삼아 새로운 의식을 탄생시킬 오로빌의 건설을 구상한다. 오로빈도는 1950년 세상을 떴지만 마더는 1968년 첫 삽을 뜨면서 이 원대한 꿈을 구체화했다. 착공식엔 124개국에서 가져온 흙을 묻고, ‘오로빌은 전체 인류의 것이며, 끝없는 교육과 지속적인 진보,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의 장이 될 것’이라는 헌장을 채택했다.
프랑스에서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권위주의 체제에 도전하며 청년문화운동을 이끌던 68세대들이 대거 오로빌에 동참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디바인(Divine·신성한) 아나키스트’라고 불렀다.
오로빈도 사후 절대적 존경을 받던 마더가 1973년 세상을 떠난 뒤 퐁디셰리의 수행공동체인 ‘스리 오로빈도 아슈람’이 오로빌을 복속시키려 하면서, 독립을 원한 68세대와 ‘내전’을 겪기도 했다. 이제 오로빌은 인도 정부에서도 인정한 자치 도시가 됐다.
초기 정착자들은 황무지를 일구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이제 숲에 둘러싸인 정원 딸린 저택에서 살고 있다. 더구나 오로빌은 산골살이와 달리 문화공연과 배움, 사교의 기회도 풍부하다. 다만 5만명을 수용하는 공동체를 구상한 오로빌에서 초기 정착자 등 2500명의 기득권자들이 좋은 부지를 선점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런 단독주택은 꿈꾸기 어렵다. 요즘은 빌라 등 공동주택을 구입하는 데도 2억원가량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오로빌의 난제로 떠오르고 있다.
방문자들은 오로빌 안에 있는 49개의 게스트하우스와 28개의 홈스테이를 예약해 이용할 수 있다. 가격은 거리와 시설에 따라서 다르지만, 내 경우 하루 숙박비가 우리 돈으로 1만원 정도인 500~600루피의 방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스트하우스엔 취사 시설도 완비되어 있어 장을 봐 요리를 해 먹을 수 있고, 공동체 안팎에 다양한 식당이나 베이커리, 카페 등을 이용해도 된다. 공동체가 워낙 넓어 걸어 다니기는 어렵다. 대부분 스쿠터를 빌려 타고 다닌다. 누리집이나 방문자센터가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이용에 별 불편이 없다. 오로빌 안에선 방문자들도 참여할 수 있는 승마와 요가와 힐링, 마사지, 침 등 치료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그러나 공동체 밖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다. 오로빌에 1000명가량의 인도인이 살고 있다. 하지만 오로빌을 이끌어가는 주류는 유럽 등 서구인들이다. 그러니 오로빌 밖과는 물가 차이가 상당하다. 하지만 일단 이곳에 살기를 원하는 뉴커머 등록을 하면 대부분의 혜택을 거저 이용할 수 있다.
오로빌엔 조그만 수공예나 목공예 공장, 농장 등 크고 작은 일터가 200여곳 있다. 하루 6시간, 일주일에 36시간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일을 더 많이 하거나 자기 일터의 수익이 좋다고 더 가져가는 구조가 아니다. 애초 자산이 많은 사람들은 대가 없이 자원봉사자로 일한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메인터넌스’라는 기초생계비를 신청한다. 그러면 의료보험료 등을 면제해주고, 솔라키친에서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 월 8500루피, 우리 돈으로 약 15만원 정도의 돈도 나온다.
오로빌리언들은 공동체 내 병의원도 대부분 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헬스케어센터엔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뿐 아니라 인도 전통의 아유르베다 의사도 있다. 나도 자가면역질환의 치료를 위해 아유르베다 의사와 면담을 하고 약을 꽤 먹었다.
오로빌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천국이다. 학비는 모두 무료다. 학교에는 선생도 아이들도 모두 이름만 부를 뿐, ‘교장선생님’이나 ‘선생님’ 같은 호칭도 없다. 시험과 상벌도 없다. 마음껏 놀고, 억압받지 않고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발현하게 한다. 깊은 내면의 자아가 존재의 중심에 서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온 다양한 친구들이 금수저든 흙수저든 상관없이 함께 어울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오로빌엔 세계적 수준의 음악가와 화가, 의사, 음악감독, 건축가 등이 적지 않다. 아이들은 이들로부터 무료로 개인지도까지 받을 수 있다.
*한국인 오로빌리언 허혜정씨와 그의 남편 볼커
솔라키친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한국인 허혜정씨를 만났다. 오로빌엔 한국인 장기 거주자 33명이 있다. 2002년부터 살고 있는 고참인 허씨는 오로빌 안의 국제구역에 인류공동체 교육과 교류의 장으로 활용할 동북아센터와 코리아파빌리온을 짓는 사업을 추진 중인 코디네이터다. 허씨의 초대를 받아 독일인 남편 폴커가 설계한 그의 집에 들어설 때, 자연과 인간과 집이 서로를 감싸주면서도 구속하지 않는 듯 조화롭고 평안한 느낌을 받았다. 폴커는 따로 건축을 공부한 적이 없다. 오로빌에 20여년째 명상을 하며 채식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건축물을 보면, 창조란 외부로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발현되는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다.
*볼커가 직접 지은 집
한국인 신참자로는 강기태씨가 있다. 그는 삼성 계열 회사에 10년간 다니며 술과 담배에 찌들어 건강이 망가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몇개월 전 과감히 오로빌로 이주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다운 음악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생각으로 악기와 노래를 배웠기에 그 과정이 노동이 되어버렸는데, 이곳에선 박치건 음치건 개의치 않고 자기만의 파동에 집중하고 자기 느낌 그대로 연주하다 보니, 내면의 감성을 깨워 치유가 되고,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감사가 되고, 저절로 예술가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허혜정씨와 볼커의 아름다운 집에서 저녁을 보낸 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올 때였다. 인도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오로빌도 가로등이 없어 캄캄했다. 스쿠터를 타고 나오다 길을 잃어버렸다. 한참 올라가니 밀림 같은 숲이 나왔는데, 아무리 가도 불빛조차 없었다. 칠흑 같은 숲에서 야생 호랑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방향을 돌려 한참을 가자 멀리서 불빛 하나가 보였다. 여자를 태운 한 청년이 다가와 “어디를 찾아가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따라오라’며 그 깊은 밤 게스트하우스 앞까지 나를 이끌어주었다. 마음대로 자란 것 같은, 어른들을 미덥게 하지 못할 것 같은 자유분방한 그 청년 커플이 그날 밤 길을 잃고 헤매던 나를 마티리만디르의 수정처럼 밝게 안식으로 인도한 것이다.
푸두체리(인도)/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