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아속
인도 오로빌
5.자기로 살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
미국 브루더호프
7.공부보다 청소와 요리에 더 열심인 아이
8.뒷담화 말고 앞에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일본 애즈원
9.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일본 야마기시
11.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 곳
» 당근을 수확하는 브루더호프 아이들. 사진 브루더호프 제공
“인생의 가장 지속적이고 긴급한 질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브루더호프공동체 누리집(http://www.bruderhof.com)에 올라 있는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이다.
지난번 ‘돈 없이 최고급 리조트에서 살아보기’를 통해 브루더호프공동체를 막상 천국처럼 그려놓고 보니 우려되는 바가 있었다. 이런 브루더호프 정신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브루더호프에서도 풍요로운 겉모습만이 보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브루더호프다운 반응이다.
브루더호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사랑과 헌신이다. 그들에게 행복은 그런 비움에서 나오는 보너스다. 다른 기독교 교단이나 수도원에 가면 교리와 계율이 많다. 브루더호프엔 하나의 계율만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이유일한 법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런 박애정신이 아니었다면 브루더호프가 초기부터 수난을 자초했을 리 없다.
브루더호프는 1920년대 독일의 대학개신교선교단체 지도자였던 에버하르트 아르놀트와 동료들에 의해 세워졌다. 아르놀트가 독일에서 오갈 데 없는 장애인이나 고아들을 돌본 게 시작이다. 당시 독일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히틀러였다. 기독교 지도자들조차 파산한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준 지도자라고 히틀러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아르놀트는 자신의 뜻을 침략과 폭력과 살육으로 관철하려는 히틀러에게 ‘사랑하는 형제 히틀러여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반대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결국 공동체는 독일에서 나치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인근 소국 리히텐슈타인으로 숨어들었지만 그곳도 나치가 장악해 갈 곳이 없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와 형제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아르놀트는 다리가 부러졌고, 다리 절단 수술을 받던 중 52살에 사망했다.
아르놀트의 부인과 자녀들과 공동체원들은 이후 영국의 시골마을 다벨에 정착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당시엔 독일인이 다수였던 브루더호프 사람들이 독일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비난이 고조됐다. 고국 독일로도, 연합국의 나라에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그들은 남미 파라과이 밀림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50여년 전부터는 미국에서 크게 성장하면서 브루더호프의 무게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한 상태다.
바깥세상에선 일 안 하고 돈을 쓰고만 살거나, 최소한만 일하고 많이 노는 삶을 ‘팔자 좋다’고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반대다. 결코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보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노인, 아기들은 배려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러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게 당연하다. 손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삶의 현장인 브루더호프가 ‘놀고 먹는 휴가지’는 될 수 없다.
나도 도착 다음날부터 공장에서 함께 일했다. 우드크레스트의 주수입원은 페이서라는 장애인용 전동휠체어를 만드는 공장이다. 이 마을에 사는 300여명 가운데 100명 가까운 사람이 이 공장에서 일한다. 아이들과 학생, 노인을 제외하고 공동식당과 세탁실에서 일하는 이들을 빼면 주요 노동력 대부분이 이곳에 투입되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 수는 주문량에 따라서 달라진다. 주문량이 많을 때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까지 공장에 투입되고, 농장에 콩 수확이 시급해지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까지 함께 농장 일을 돕는다. 공동체원들은 필요한 곳으로 유연하게 움직인다.
공장 노동은 아침 7시30분에 시작해 점심시간인 12시까지, 또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다. 오전과 오후 중간에 15~20분가량의 휴식시간이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온전히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전동드릴로 나사를 박아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주로 했다. 한가지 일에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일이 주어졌다. 주문량에 따라 일도 달라지는 것이다. 미국은 선진국이고, 이 공장은 유명 브랜드를 생산하는 곳이다. 유기농 샴푸나 비누를 수작업으로 하던 타이의 아속공동체가 가내수공업 같은 것이라면 이곳은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경쟁하는 공장이다. 노동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동의 목표가 이윤 창출이 아니라 약자들을 돕는 사랑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남다르다.
나는 처음엔 실수가 많아서 옆에서 일하던 톰이 “나사를 이렇게 느슨하고 비틀어지게 박으면 안 된다”며 지적했다. 며칠이 지나자 반장 스티브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줄 정도로 내 실력도 늘었다. 하지만 온종일 일하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특히 의자 없이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가 저려왔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이런 노동에 이골이 난 듯 조립을 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르거나, 가끔씩 따뜻한 눈빛과 웃음을 보내주곤 한다. 주위엔 필라델피아 출신 청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찾아온 부부 등 브루더호프의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들 역시 손님으로 지내는 게 아니라, 도착 즉시 한 마을 사람처럼 일을 했다.
처음 며칠은 전동드릴과 망치가 손에 익지 않아 손바닥이 부어오르고 피멍도 들었다.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 누우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브루더호프가 천국처럼 아름답고 사랑이 넘쳐도, 나 같은 책상물림은 일을 감당 못해서도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 이상 노동을 하며 노동에 대한 내 안의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가끔은 요리하고 텃밭을 가꾸는 걸 즐기는 편이지만, 그건 하고 싶을 때일 뿐이었다. 노동이란 가급적 하고 싶지 않은 것이란 무의식이 보였다. 이 마을에서도 푸른 초원과 수영장이 천국이지 이런 공장은 천국이 아니라고 유아적으로 ‘삼팔선’을 긋고 있었다.
브루더호프의 천국은 이기심 극복 투쟁
타인과 약자 등 이웃 사랑의 보너스
브루더호프의 가장 긴급한 질문은
“타인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
어린 아이들도 거부감 없이 노동 참여
밭일과 요리, 청소 등 집안일 함께 해
노동에 대한 무의속 속 거부감있는 아빠와
달리 아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일하는 딸
아이들의 천국되게 해주면서도
한살박이 아이에게도 놀이하듯 일 시키고
떼쓴다고 봐주지않은 아이 교육 철저
» 우드크레스트의 공장에서 일하는 필자
» 변호사 하이너가 아들 마크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조현기자
» 브루더호프의 마운트아카데미. 사진 조현기자하루는 딸에게 멍든 손바닥을 보여주며 엄살을 부렸다. 그랬더니 딸도 농장에서 일하다 애호박의 잔가시가 박혀 피가 맺힌 손을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오전엔 주로 마을 내 아기들을 돌보는 육아방에서 보조교사를 하거나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엔 방학을 맞은 또래 친구들과 수영장 등에서 놀았다. 그런데도 딸은 “난 할 만하고, 그래도 재밌던데…”란다.
“헐. 뙤약볕 아래서 일하는 게 재미있다니!”
한국에서 그런 노동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딸의 반응이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여기 애들은 다 그래”라고 답했다. 노동을 의무적으로 하는 걸 넘어 즐기는 경지에 오르다니. 또래 집단의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는 나이 때문일까, 나보다 ‘삼팔선’을 빨리 타파해 일상적인 노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딸이 부러웠다.
한국에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며 집안일 등 노동에선 ‘열외’를 시키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선 아이들도 일에서 예외가 없다. 내 옆집에 사는 변호사 하이너는 아침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 마크와 식사를 준비했다. 마크가 프라이팬에 요리를 하게 하고 하이너는 뒤에 서서, 꼭 필요할 때만 “이렇게 해보면 어떠냐”고 가르쳐주었다. 부엌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마을공동 쓰레기장에 버리고 오고, 샤워실에서 나온 수건들을 마을세탁실에 가져다주는 것도 일곱살 마크의 몫이었다.
노동의 분배는 이웃간에도 효율적이었다. 가령 식사에 초대를 받으면 설거지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했다. 나도 처음 몇번은 눈치 없이 먹고만 왔지만 나중엔 설거지와 청소를 했다. 브루더호프에서 일을 거부하지 않는 또래들처럼 딸도 설거지와 청소를 야무지게 해내곤 했다. 감개무량했다.
우리 부녀를 여러 번 초대한 호스트 글렌과 아델에겐 귀엽기 그지없는 한살배기 아들 숀이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나면, 아델은 의자에 선 숀 앞에 설거지통을 끌어다놓고, 소꿉놀이를 하듯 함께 설거지를 했다. 말을 배움과 동시에 일도 그렇게 함께 배우는 것이다. 규율도 마찬가지였다. 숀이 식사에 초대받은 자리에서 음식이 나오는데도 딴짓을 하면 좌시하지 않았다. 한두 번의 경고에도 계속 장난을 치고 있으면, 숀의 의자를 뒤로 돌려놓고 벽을 쳐다본 채 반성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숀은 아직 벌이 무언지 모르기 때문에 고개를 우리 쪽으로 돌려서 장난스레 미소를 날리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이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때론 냉정하다 싶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사랑을 듬뿍 주지만, 과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떼를 쓴다고 봐주는 법도 없다.
가령 내 옆집엔 크리스네 가족이 사는데, 크리스와 헤나는 성인이 된 아들과 중고생 두 딸을 두고 있지만, 한살배기 늦둥이인 아들 스티븐이 있다. 스티븐은 장난꾸러기이자 울보였다. 크리스와 헤나는 스티븐이 자야 될 시간이 되면 홀로 방에 재웠다. 스티븐을 아기 침대에 누이고, “아빠는 너를 사랑해” 하고 방을 나오면 그만이었다. 스티븐이 아빠를 목이 터져라 불러도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크리스와 헤나가 이웃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가면서 옆집에 얘기하고 나간 뒤였다. 스티븐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그 방문을 살짝 열어봤다. 그랬더니 스티븐은 울면서도, 아기 인형에게 아빠가 자기에게 하듯이 ‘아빠가 사랑하니, 울지 마라’ 하고 다독이고 있었다. 코흘리개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안아주고 말았다. 아마 그의 아빠 같았으면 문을 열어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우드크레스트에서 차로 20분 거리엔 브루더호프가 백년 넘은 가톨릭수도원을 사들여 2012년 문을 연 고교과정 마운트아카데미가 있다. 이곳의 교육 목표도 공부 잘하는 아이를 기르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게’ 일차적 목표다.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이 학교가 학력은 물론 스포츠 등 각종 경진대회에서 뉴욕주뿐 아니라 미국을 휩쓸자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기자는 학교를 취재해보고 공부나 스포츠를 하는 모습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대걸레를 들고 학교를 청소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썼다.
브루더호프에선 요란한 기도나 수도를 찾아볼 수 없다. 말없이 자기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그 일이 바로 비움이고 자기 수련의 과정이다. 그런 헌신 속에 노동의 피로가 있기에 퇴근 후 잔디밭에서 가족과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달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