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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로 환생하고싶었던 캬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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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선불교의 직관과 음률을 결합시킨 클래식 음악의 황제
알랭 베르디에  |  yayavara@yahoo.com



카라얀1.jpg» 카라얀은 선불교를 통해 다른 이들의 민감하고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세워둔 모든 목표들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그가 목표를 높이 세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악보 보지 않고 곡 외워
춤추는 듯한 지휘로 유명

명상을 통해 마음 비우고
단원들 환상 호흡 이끌어

불교 이해가 깊어갈수록
사람들 미묘한 감정 감지

선불교와 기독교 결합시킨
라살레 목사에게 큰 감명

선과 음악 환상적으로 조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20세기뿐만 아니라 전 역사를 통해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지휘자일 것이다. 베를린 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로 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비엔나 국립협회의 예술감독으로도 활동한 카라얀은 어쩌면 클래식음악계를 상징하는 아이콘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현대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최고로 끌어올렸다고 칭송 받는 카라얀을 일컬어 세계언론은 ‘거장’, ‘천재’, ‘환상의 창조자’, 혹은 ‘음악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을 가진 카라얀을 연상시키는 대표적인 모습은 오케스트라 지휘를 시작하기 전 깊고 푸른 색의 눈을 지긋이 감고 악보를 보지 않은 채 기억만으로 곡을 외워 춤을 추듯 지휘를 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그가 음악이라는 최면에 완전히 빠져 있는 듯 신비롭다. 타임지는 카라얀과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유럽 음악 전통의 최고 권위자”라고 그를 평가했다. 음반 판매량을 보더라도 전세계를 통틀어 1억 장이 넘어가는 기록을 가진 그이기에 클래식 음악을 멀리하는 사람들도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선불교 신자였다. 요가와 참선으로 정적인 여유 시간을 보내던 카라얀은 소형 비행기 조정이나 요트 레이싱, 카 레이싱, 산악 자전거와 같은 격한 스포츠도 즐겼다. 최신 전자제품이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얼리 어댑터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프랑스의 생 트로페즈, 스위스의 생 모리츠와 같은 휴양도시에 저택을 소유했던 그는 각각의 집에 수행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그가 유명한 지휘자로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한 것도 바로 불교 덕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말씀과 선불교의 철학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협력에 적용했다. 그는 자신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가 될 때 최고의 음악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최근 유튜브에서 베토벤 7번 교향곡을 지휘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 속에 담긴 그의 모습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지휘를 하는 모습이었다. 베토벤 특유의 장엄하고 경쾌한 장단과 리듬에 완전히 젖어 있는 듯한 카라얀의 지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 인간은 언어라는 훌륭한 표현의 도구를 가졌지만 카라얀의 지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언어 말고도 인간이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토벤 7번 교향곡의 환희와 낙관을 표현해 내는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그의 열정적인 몸짓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유형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카라얀은 눈을 감고 있을 때 음악이 머리 속에 펼쳐지고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더욱더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에게 음악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수행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왔던 카라얀은 선불교를 통해 다른 이들의 민감하고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능력은 그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더 밀접한 인간관계를 쌓아가고 서로를 신뢰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런 인간관계는 매번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내곤 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명한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서 우주선이 우주 정거장에 정차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들어보면 평소 선불교 신자로서의 삶이 음악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느끼게 한다. 40여년이 넘게 선불교 신자로서 수행을 해왔던 그는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들이 그가 음악계에 오랫동안 몸담을 수 있는 동력이 됐다고 한다. 선불교의 가르침처럼 가만히 앉아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작은 변화와 미묘한 움직임에 귀 기울이는 능력을 키우면서 음악에서도 작은 리듬의 변화나 음정의 작고 세세한 높낮이에도 민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카라얀은 설명했다. 

카라얀은 1908년 4월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폰 카라얀(Ernest Von Karajan)은 잘츠부르크 종합병원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외과의사였다. 언젠가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아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세상을 살면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란다.” 

이 말은 어린 소년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자신이 음악에 소질이 있음을 발견한 그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음악이라고 결정하고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5살이 되던 해, 발이 피아노 페달에도 닿지 않는 작은 키로 자선연주회에 참가해 모짜르트의 론도를 연주했고 9살이 되던 해, 그는 그의 이름을 건 최초의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렇게 피아노로 음악 경력을 쌓아가던 어린 카라얀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과 천재성이 피아노에만 국한되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방향을 선회했다. 결국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1935년 독일 역사상 가장 어린 지휘자로 선출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1937년에 비엔나 국립오페라의 전임지휘자로, 1938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함으로써 최초의 연주회를 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정치에 관심이 없던 카라얀이 갑자기 나치 당에 가입한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방해 없이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계속해 이어갈 수 있었다. 전쟁이 점점 확산되어 가는 시기에 카라얀은 유태인 출신의 아니타 구터만(Anita Guterman)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이 결혼 때문에 나치당은 독일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그를 해임했다. 그는 가족의 안위를 위해 이탈리아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나치당의 압력 때문에 어디서도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힘든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카라얀은 길고 길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음악인으로서 경력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1950~70년대 카라얀은 유럽에서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로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카라얀은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수많은 불교서적들을 읽었다. 그러던 중 그는 선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을 일상생활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기 시작했다. 독일의 예수교 목사이자 참선의 대가였던 휴고 에노미아 라살레(Hugo Enomiya Lassalle)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선불교를 잘 결합한 인물이었는데 카라얀은 라살레 목사를 만나 친해지면서 선불교에 대해 확실하게 눈을 떴다. ‘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Zen, A Way to Enlightenment)’이라는 책을 집필한 라살레 목사는 선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강조하며 선불교가 기존의 기독교에 좋은 영향을 미쳐 오랫동안 침체되어있던 기독교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라살레 목사와의 인연과 그의 저서들은 카라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카라얀은 선불교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은 물론 음악 활동에까지 적용시키게 됐다. 미국 출신 유명한 저널리스트 로저 보간(Roger Vaughan)과의 인터뷰에서 카라얀은 이렇게 말했다. 

“라살레 목사님이 설명하는 불교에 관한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벅찬 감동은 지금도 잊기 힘들어요. 그런 감동을 주는 책을 쓴 저자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감동은 두 배가 됐지요. 라살레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치 그 분은 20여년간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불교를 통해 그의 음악세계가 크게 성장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상을 통한 집중과 비움은 단원들과 소통해야 하는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확장시켰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절대로 ‘내가 지휘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뒤에는 언제나 그 분께서 계시니까요.” 

그가 음악을 하면서 얼마나 부처님께 의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8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그는 마지막 콘서트를 가졌다. 콘서트를 마친 후 얼마 뒤인 7월16일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그가 81살 되던 해였다. 카라얀은 환생을 굳게 믿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다시 환생한다면 독수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알프스산맥 곳곳을 날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수리로 환생하고 싶어했던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선불교와 음악을 환상적으로 결합시켜 가장 완벽하게 표현했던 역사상 드문 음악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알랭 베르디에 저널리스트 yayavara@yahoo.com

<법보신문>(http://www.beopbo.com/)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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