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에 실린
숭실대 교수 김회권 목사의
종교개혁 시리즈 3편가운데
마지막편입니다.
»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성모교회에 서있는 마틴 루터상. 사진 픽사베이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유산 1 : 루터의 회심 체험
이처럼 예수의 피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다고 고뇌하던 루터의 양심가책증을 치유했다. 자기 인생이 지극한 영적 건조증에 빠져 있으며 하나님의 분노와 불쾌의 대상이라고 고뇌하던 루터의 영혼에 예수의 피가 뿌려지자마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불안이 사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지·정·의를 소생시키는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가슴 속 깊은 사랑이 루터의 영혼에 유입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첫 출발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사로잡히는 경험이었다.
보름스 국회(1521)에 소환된 38세의 젊은 사제 루터는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황제 카알 5세와 로마 교황의 대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내 양심과 반하여 하는 말은 정당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약 100년 전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화형했던 바로 그곳에서 루터가 이렇게 용감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복음에 붙들렸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의해 그 양심이 송두리째 포획된 사람만이 무한히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종교개혁을 외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루터를 가졌는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승하려면 루터의 양심을 강력하게 사로잡은 하나님 말씀에 결박당한 자가 나와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 앞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면 루터적 양심가책증을 먼저 앓아야 한다. 루터는 너무나 사소한 죄를 가지고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는 데 비해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한 번도 진정하게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꽃 같은 거룩한 시선도 도무지 경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지를 상상조차 못하기에 너무 쉽게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단정하며 구원을 쉽게 확신한다.
한국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확신하는 구원’이 과연 루터적 양심가책증을 통과한 후 맛보는 구원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따라서 루터를 이해하고 계승하려면 가장 원형적인 이신칭의 복음에 붙들리고 추동되는 그의 구원 경험을 에누리없이 추체험(追體驗)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순전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이 임하고 하나님 복음의 뜨거운 생명력에 사로잡힌 자들에 의해 착수될 수 있는 신적 가능성이다.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갱신되고 쇄신된 개인에게서 발화하는 것이 종교개혁적 불씨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이 드린 속죄의 피의 효력을 루터처럼 깨닫고 임상 경험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가? 예수의 피복음과 그의 보혈로 구원받고 십자가의 권능으로 자신의 옛자아 해체를 경험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가? 쉽게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온갖 불의한 쾌락과 불법 가득 찬 축재와 타락상을 뉘우치고 루터적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의 기초 동력도 축적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의 보혈로 자기쇄신을 맛보지 않고는 자기 밖의 사람들과 제도를 향해 개혁을 외칠 수가 없다.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유산 2 : 디아코니아 신학의 토대가 된 이신칭의 신앙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유산은 이신칭의 구원이 이웃 사랑의 봉사 신학으로 객관화된다는 사실이다. 루터의 구원은 그의 내면과 양심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루터가 받은 구원은 결코 개인 구원이 아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신실케 된 신자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확신했다. 루터는 로마서 8:1~4 강해에서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이신칭의 경험의 진수가 하나님의 율법 요구를 행할 능력을 갖게 됐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영적 분투가 필요 없는 몽환적 무릉도원으로 피신해가는 그런 의미의 구원을 말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의로 의인이 됐다는 말은 언약적 요구를 그리스도인이 다 수행하고 성취했다는 의무 성취 종결선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의인이 됐다는 말은 언약적 결속감과 언약적 의무감을 회복하고 복원했다는 말이지 더 이상의 언약적 의무 수행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으뜸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죽기까지 성취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100% 준행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계명을 일생 동안 준행하며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내포한다. 루터에게 칭의는, ‘당신은 이제 하나님과의 계약적 요구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샘솟는 사랑을 맛보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함으로써 당신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십시오’라는 요구로 귀결된다. 그는 한때 야고보서를 아기 예수를 깜싸는 부드러운 강보(로마서, 갈라디아서)가 아니라 말구유의 가장 밑에 깔려 있는 지푸라기 정도라고 폄하했지만, 야고보서 1:25이 말하는 ‘자유케 하는 율법’의 의미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그는 이신칭의를 덧입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자라고 보았다. 루터가 한 말 중에 ‘크벨레 리베’(Quelle Liebe, Spring of Love)가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의인화된 죄인의 마음 속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충일한 사랑(롬 5:8~10)을 가리킨다. 이 ‘사랑의 샘’이라는 어구는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입된 하나님의 사랑 샘이 터져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샘솟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루터는 전가된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삶을 통해 행동화하는 의가 된다고 보았다. 구원받은 신자가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사랑 샘에 추동되면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준행할 힘을 덧입게 됨으로써 전가된 의는 이웃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의로 치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사랑의 샘에서 솟아나는 사랑으로 율법의 요구를 초월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 디아코니아다. 디아코니아 신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집사가 되어 봉사하는 것을 장려한다. 결국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의 열매가 디아코니아 신학으로 결실한 것이다. 디아코니아 신학의 테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돌입했는가? 답은 이웃 사랑에 투신한 사람만 하나님과 의롭게 된 자다”라는 것이다. 의롭게 됐다는 증거는 이웃과 화평한 상태에 들어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투신된 삶이다. 루터는 하나님과 의롭게 됐다는 확신을 양심의 판단에만 맡기지 않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을 마련한 셈이다.
로마서 12:1~3과 13:8~10이 바로 이신칭의 신학이 디아코니아 신학으로 결실되는 원리를 설명한다. 로마서 12:1~3은 하나님의 큰 자비로 구원받고 의롭게 된 사람은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으로 자신의 의롭게 된 구원 경험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여기서 ‘영적 예배’의 헬라어는 ‘로기코스 라트레이’이다. ‘로기코스’는 ‘논리적인’(logical) 혹은 ‘합리적인’(reasonal)을 의미하며, ‘라트레이’라는 말은 ‘예배’ 혹은 ‘봉사’(service)를 의미한다. 의롭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예배드린 행위가 이웃을 섬기는 행위라는 것이다.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몸 제물은 이웃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행위로 나타난다. 즉 이웃의 필요에 던져진 내 몸은 하나님 제단에 드려진 산 제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말한 봉사 신학이며 그 봉사 신학의 뿌리는 이신칭의 신학이다. 이신칭의의 완전한 형태는 이웃 사랑을 위해서 제단에 바쳐진 몸 신학이다. 그래서 루터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에서 국가복지제도가 빨리 정착되었다. 이웃에게 봉사하는 길만이 하나님께 의롭게 된 자임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모든 루터교 국가 시민들(특히 독일인)은 이웃을 위해 돈 내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그들은 높은 세율의 세금을 기꺼이 내기에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북구 복지선진국가들, 즉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 등 전부 다 독일 루터파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들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소책자에서 이 봉사 신학의 역설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된 자는 이웃을 위해 종이 될 정도로 자유케 된 자다. 나는 하나님의 속량은혜로 만민에게 자유하지만 하나님의 속량은혜로 말미암아 만민의 종이 되었다.”
이신칭의를 누리고 성령충만을 받는 성도들은 종말론적 확신 속에서 돈을 숭배하고 형제자매들을 물신적 노예상태로 부려먹었던 모든 맘몬추구적 삶을 포기하고 돈을 가지고 형제를 살리고, 자기 힘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낭비를 일삼게 될 것이다. 이신칭의를 받고 로마서 8장처럼 성령의 충만함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는 사람들은 동터오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확신 때문에 먼저 자신의 힘을 다하여 이웃 사랑에 힘쓴다. 루터나 본회퍼는 이렇게 급진적인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민간조직으로서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위라고 보았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공동체를 아주 순간적으로 간취(看取)한다. 예루살렘 원시교회 교인들은 하나님 예배를 이웃 사랑으로 표현함으로써 교회 안에는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강력한 언약적 결속감으로 뭉쳐 있었다. 그들은 서로 돌보았을 뿐 아니라 모든 가난한 사람을 돌봄으로써 그들 가운데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게 만들었다.
맺는 말
루터의 종교개혁이 결코 완벽한 종교개혁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한국교회가 계승하고 터득해야 할 교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 개인의 양심이 하나님 말씀에 포획되어 촉발된 운동이었다. 루터가 청년기에 발견한 하나님 말씀은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차게 질책하고 그 죄상을 폭로하는 예언자적 말씀이며 고딕적 불안에 시달리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이었다.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확신으로 승화된 신앙만이 부패한 제도권 종교권력 체제와 맞설 수 있게 만드는 영적 무용(武勇)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루터는 인간은 자기 마음을 정복한 확신들에 의해 창조되고 형성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경험했다. 마음 속에서 확신하게 된 진리만이 우리의 관계적인 존재를 변화시킨다. 인간은 믿는 동물이며, 인간의 삶은 그가 진리라고 믿는 것 속에서 그리하여 궁극적인 신뢰를 쏟아붓는 것 속에서 그의 존재를 끌어가는 방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오직 말씀의 수레를 타고 오는 성령만이 거대한 구조악과 맞설 수 있는 개인의 확신을 창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확신은 조작될 수 없지만 사람들이 믿는 바 확신의 내용은 공적인 논쟁과 공적인 토론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확신 주관주의로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진실로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로 창조된 확신은 복음 선포라는 외적인 형식을 통해 선포되고 공적인 광장에서 토론되고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교회와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확신은 기독교회의 선포와 삶, 그리고 공적 토론을 통해 객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류에게 행하는 봉사와 섬김이 바로 하나님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임을 강조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삶을 하나님 눈 앞에서 공로를 세워야 할 벌판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만유 위에 있는 자유케 된 주(主)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은 세상을 섬기는 활동을 통해 세상 안에서 실습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는 사명은 모든 직업과 모든 활동을 통해 실습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믿은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직업영역에서 만인제사장적 봉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유산 중 이신칭의와 디아코니아 신학은 현대 독일의 국가적 재활복구 과정을 설명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몰트만의 자서전 앞부분을 보면 루터가 독일신학과 독일정신을 창조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영감의 원천인지를 알 수 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이신칭의 신학은 단지 인간구원의 신학 테제 이상이었으며 두 차례 전범국가로 낙인찍혔던 독일을 재활복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이 없었다면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전쟁을 30년 안에 두 번이나 겪은 독일이 오늘날처럼 재건될 수 없었을 것이다(《몰트만 자서전》, 66쪽). 독일이 1,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존심을 회복하고, 언약재갱신과 재활복구를 경험한 것은 바로 만신창이가 된 죄인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의로 의롭게 되는 루터적 경험의 공동체적 적용 사례다.
루터가 쓴 마지막 성경주석인 창세기 주석(1546)은, 이신칭의란 인간의 허무한 쓰레기 경험(죄)과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악행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눈부신 의와 은혜를 창조하시는 새 피조물 창조 사건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창세기 주석은 시궁창 아래 굴러떨어진 인간의 존엄 상실 경험들을 활용해서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견인적 은혜를 철저하게 부각시킨다. 루터가 보기에는 참혹한 죄악과 그것을 역전시키는 의인화(義認化) 복음의 역설의 병치가 창세기를 관통한다. 루터의 모든 저작들은 야만적인 문명 안에서 우주의 먼지처럼 작아지는 인간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만지게 한다. 이 뜨거운 구원 경험이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의 열매인 디아코니아 신학을 배태한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1, 2, 3》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