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에 실린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김회권 목사의 종교개혁 글 3편 중 2편
루터의 종교개혁 동력, 복음의 재발견
이런 고딕적 불안에 시달리던 루터는 스물두 살 무렵에 쉬토테른하임이라는 곳에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보고 동정녀 마리아의 어머니이자 광부들의 수호성인으로 존숭되던 성 안나를 부르며, “성 안나여 저를 살려주시면 제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하고 말았다. 1505년에 스물두 살 청년 루터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하나님께 용납될 만한 자가 되어 구원을 향유하고 싶었던 루터는 수도사가 되어서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했다. 에르푸르트 수도원 수도사 시절에 루터는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저녁 8시에 잠들면서 분투를 거듭했지만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죄책감으로 가득 찼다. 독일어로 ‘안페히퉁’(Anfechtung)이라고 불리는 도덕적 양심가책증이 그를 포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하는데 비해, 루터는 매일 한 번씩 고해성사를 했다. 루터의 고해성사를 받았던 존 스타우피츠 수도원장은 루터로 하여금 더 이상 중세적 고딕 불안에 빠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결국 30세를 전후한 루터의 내면은 중세적 고딕의 불안과 자기가 가졌던 독특한 종교적 감수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대표하는 의(義), 즉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불쾌감과 심지어 무관심을 몸서리치게 느꼈다.
무엇보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편 31:1의 라틴어 성경 번역인 “당신의 심판에 나를 넘기소서” 때문이었다. 지금 성경에는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 모두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쁘치드코터카 팔러테니)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이 당시 루터가 읽은 라틴어 역본에는 “당신의 심판에 나를 넘기소서”라고 번역되어 있었다. ‘당신의 의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당신의 의로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오해한 루터의 영혼은 평화를 잃고 동요했다. 미사나 고해성사는 물론이요 로마 순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1510~1511년의 여덟 달 동안 로마에 체류하면서 죄용서 효능을 일으킨다는 로마의 빌라도 계단을 무릎 꿇고 올라갔지만 그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루터는 사흘에 한 번씩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했다. 20대에 갔던 수도원에서 여성을 보고도 한 번도 음욕을 느끼지 못했고, 사제가 되어서도 여신도의 고해성사는 딱 세 번만 받았다. 심지어 여신도의 고해성사를 받을 때 목소리를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주발 너머의 얼굴 윤곽도 보지 않았다. ‘수도원 규칙준수로 말하면 천국의 가장 꼭대기에 가야 할 내 영혼이 왜 이렇게 황량하고 쓸쓸하며 하나님은 내 인생을 향해서 진노를 드러내고 있는가?’라고 그는 늘 생각했다.
이런 루터의 고뇌가 7년간(1505년 수도원 입회부터 1512년 시편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기까지) 계속되자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시편 71편, 31편, 로마서 1:16 등을 통하여 은혜를 주셨다. 그는 먼저 시편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후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1512~1520년까지 종교개혁의 영적 동력 축적기에 깊이 연구한 책들)로 나아간다. 시편은 도덕적 건조증과 죄책감에 휘둘리며 하나님 앞에서 진창과 수렁에 빠졌다고 느끼던 루터에게 영적 소생력을 제공했다. 시편에서 복음의 시적 표현을 발견한 루터는 로마서 1:16~17에서 복음의 명료한 진술을 보았다. 16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곧 ‘하나님의 신실성’임을 깨달은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가 죄인을 지옥으로 던지는 심판의 정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구원의 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발견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원리다.
루터는 여기서 말한 ‘신’(信)은 신자의 믿음을 가리키기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요구를 100%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전(영성체)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유입된다고 가르친 반면,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하나님의 의’ 성취를 믿으면 그때 하나님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편, 히브리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이 네 책을 약 8년에 걸쳐 집중 연구하고 강의함으로써 루터는 나중에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가톨릭교회의 적폐해소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내적 구원의 확신을 구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네 책 연구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이해로 가는 주석 과정이었다.
8년의 성경연구에서 터득한 진리
8년 여에 걸친 성경연구를 통해 루터가 깨달은 진리는 다음과 같다.
1. 죄인을 의롭다하심 곧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즉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우리는 죄에 대한 양심의 고통스런 자각을 가지고 어떤 선행으로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덧입는데 이바지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의뢰하고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홀로 우리 믿음의 최고 기준이 되는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바다. 이 단순한 깨달음이 후에 종교개혁의 배타적인 슬로건으로 정착된,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solo Christo),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로 결실된다.
2. 이 신조들은 오로지 성경이 최고 권위를 가지고(sola scriptura) 증거한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이 신조들은 어떤 세상적 혹은 종교적 권위보다 더 높으며 황제나 교황의 권위보다 더 높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의 확실성 안에서 한 개인으로 하여금 교권이나 황제에 대항할 능력과 용기를 고취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주권적 자유 가운데 은혜를 나눠주신다면, 스스로 은혜를 나눠줄 수 있다고 말하는 교황청 교회의 주장은 분쇄된다. 만일 모든 인간이 그들의 종교적 선행이나 그들에게 부여된 영적 위엄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똑같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을 가졌다는 교황청의 모든 주장들은 공허한 주장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종교적 위계질서의 종말, 즉 사제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 구원은 후기 스콜라신학의 매개 신학(사제들에 의한 일곱 성사 매개를 통한 구원의 유입)을 통해 경험되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 성령의 권능으로 동력화된 하나님의 복음이 직접 속죄의 확신과 죄사함의 효능을 방출함으로써 일어난다. 동물희생의 피제사가 이스라엘을 1년간 의롭게 해주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흘린 피는 세계만민을 의롭게 할 수 있는 영단번에 드려진 제물의 피였다. 예수의 피는 하나님 자신이 계약관계를 유지하려는 결심을 천명한 사건이기도 할 뿐 아니라 죄인의 양심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하도록 언약적 결속을 창조한다.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의로운 삶을 창조하도록 부단히 격려하는 사랑의 샘이 된다. 이신칭의 복음은 사랑의 샘에서 흘러나온 이웃 사랑 실천의 윤리로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의 피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신칭의의 복음은 의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행동화될 복음인 것이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