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의 노숙인. 사진 픽사베이 제공
부처님의 가르침이 좋아 출가수행승의 길에 든지 어느덧 40년을 맞습니다. 제가 깃들어 수행하는 곳은 땅끝마을 두륜산 대흥사 안의 일지암一枝菴입니다. 이 암자는 “뱁새는 언제나 한마음이기에 때문에 나무가지 한 끝에 살아도 편안하다” 당나라 시인 한산 스님의 시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일지암은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에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 등과 교유하면서 이 땅의 다도茶道를 다시 일으킨 초의草衣 선사가 다선일미茶禪一味의 문화를 꽃 피운 곳입니다. 우리 나라 다도의 성지입니다.
이 곳 일지암은 스님들도 감탄하는 수려한 풍광과 서해를 바라보는 황홀한 조망을 가진 명품 암자입니다.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마루에서 차를 마시노라면 마음에 깃든 온갖 감정의 불순물들이 일시에 사라집니다. 자족과 무위의 삶을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산문을 나서면 무욕과 자족으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먹고 사는 민생의 어려움,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정의와 평등의 실종, 교묘한 억압구조 속에숱하게 겪는 모멸감... 그래서 붓다는 세상을 무지와 탐욕으로 ‘불타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두가 존귀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고통과 불안에 덮혀 있으니 내 그들을 구제하리라“
저는 3년전부터 매주 월요일에 어김없이 산승에서 ‘수도승’으로 변신합니다. 수도승이 무어냐고요? 우리들의 은어인데요, 도를 닦는 수도승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도에 사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매주 월요일, 산승은 새벽 4시 30분에 땅끝에서 나주역으로 이동합니다. 다시 나주에서 첫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닿습니다. 이 때부터 자동으로 모드 전환, 수도승이 됩니다. 그리고 9시 30분 통인동에 있는 참여연대에 도착합니다. 매주 월요일에 열리는 상임집행위원회에 참여합니다. 각 센터에서 올라 온 주요 현안을 논의합니다. 감시와 대안, 참여와 연대를 위한 다양한 의견과 반론이 오고갑니다. 당당한 주장과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노숙자에게 밥 한 끼를 주면 성스럽다고 칭찬하는데, 우리 사회에 많은 노숙자들이 생기는 이유가 무어냐고 물으면 좌파라고 낙인을 찍는다”. 개개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손길도 중요하지만 정녕 지혜로운 사랑과 자비는 이 땅에 노숙자로 상징되는, 인간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게 하는 구조와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감히 ‘시민 보살’을 염원하면서 좋은 세상을 꿈꾸는 벗들과 참여하고 연대하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힘’... 요즘 제가 사유하는 화두입니다. 진실과 사랑의 힘을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그 자리가 바로 ‘참여연대’임을 깨닫습니다. 비록 부족하고 미약한 힘이지만, 참여연대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고 세상을 바람직하게 가꾸는 일에 나 한 사람이라도 힘을 보태고, 뜻을 같이하고 가슴이 따뜻한 이웃들과 손을 잡는 일, 이것이 바로 제 방식의 자비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가 밥을 구하러 가네/빈 그릇 하나 들고/한 집/ 두 집/세 집/밥을 얻으러 가네/일곱 집을 돌아도/밥 그릇이 절반도 차지 않을 때/그 사람/여덟 번째 집에 가지 않고/발걸음을 돌리네/일곱 집을 돌았어도/음식이 부족하다면/그만큼 인민들이 먹고살기 어렵기에/그 사람/더 이상 밥을 비는 일을 멈추고/나무 아래 홀로 앉아 반 그릇 밥을 꼭꼭/눈물로 씹으며 인민의 배고픔을 느끼네.
박노해 시인은 <구도자의 밥>이라는 시에서 석가모니의 심정을 대변합니다.어찌 붓다만이 이런 심정이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를 부처로 존중하며 ‘사이 좋게’ 지내기를 염원하는 모든 시민의 심정이 이러할 것입니다.
조용히 내게 묻습니다. 내 몸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심장도 뇌도 아닙니다. 지금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그곳에 온전히 집중하니까요. 그렇다면 부처님은 날마다 어디에 오실까요? 이 세상 가장 아프고 슬픈 곳에 계실 것입니다. 간절하게 부르는 곳에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내곁에 있는 이웃이 부처입니다. 어느 누군가 나를 부른다면, 어느 누군가 많이 외롭고 아프다면, 그곳에 다가가 위로와 응원의 손을 잡는 그가 부처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웅전의 부처만을 볼 줄 알지, 내 곁의 부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 곁의 부처님들이 아프다고 합니다. 내 곁의 부처님들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합니다.
유마경의 보살이 이렇게 여민락(與民樂)의 세상을 염원합니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
‘그대가 지금 바로 부처다’”라고 선언하는 화엄경에서 이렇게 기쁨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중생에게 공양하는 것이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중생의 기쁨을 먹고 사는 분이기 때분이다”
날마다 오셔야 하는 부처님, 어느 곳에서든 계셔야 하는 부처님.
마음에 깃든 어둠 걷어내고 참된 성품 밝히는 날.
이웃의 마음에 존엄과 자비의 등불을 밝히는 날.
간절한 마음이면 닿지 못하는 곳이 없으리니
그 간절한 ‘한 사람의 큰 힘’을 모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