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 ‘초교파 수도공동체 테제’ 수사
“결점 투성이 우리가
함께 살아내는 게 기적”
1980년대 박종철과 한집서 하숙
최류탄 맞은 이한열과 같은 이름
민주화운동 두주역과 인연
그러나 테제의 독신수도자로 다른길
26살에 잠깐 머물려고 갔다가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아서 좋아
어느덧 30년 몸담고 있다
나치 학살 땐 유대인 숨겨주고
전후엔 독일군 포로를 맞이했다
국적 종교 성향 다른 100여명 모여 산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도 무신론자…
1년 내내 젊은이 모임도 연다
“누군가가 얘기하면 말 끊지 말고
10초씩은 침묵하며 기다려라”
둘이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국적, 종교, 성향이 다른 이들이 함께 사는 일이 녹록할 리 없다. 그런데도 서로 존중하는 일치의 삶으로 세계인들을 치유하는 공동체가 있다. 프랑스 동부 작은 마을 ‘테제’다.
1940년 스위스 출신의 로제 수사가 시작한 에큐메니컬 수도공동체인 테제(국내에서는 ‘떼제’로 알려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학살을 피해 도망쳐 온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전후엔 독일군 포로들을 맞이했다. 개신교회 출신들이 시작했지만 점차 가톨릭 출신들도 입회했고 오늘날 30개국에서 온 수사 100여명이 그리스도교 초교파 남성 독신수도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테제의 수사들은 일체의 기부나 헌금을 받지 않고 자기들이 만든 도자기와 기념품을 공동체에서 팔아서 살아간다. 그러면서 20여명의 수사를 브라질, 방글라데시, 쿠바, 한국, 세네갈에 파견해 화해와 일치를 돕고 있다.
테제가 유명해진 것은 젊은이들의 성소가 된 때문이다. 일요일부터 다음주 일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연중 계속되는 젊은이 모임엔 주당 5천여명이 모일 때도 있다. 이 모임엔 개신교·가톨릭뿐 아니라 무신론자, 불교도까지도 함께한다.
박종철과 한때 같은 집에 하숙
그 테제에 한국인 신한열(55) 수사가 처음 간 것은 1988년 26살 때였다. 3개월간 예정으로 간 체류는 이제 30년을 앞두고 있다. 그가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지성사 펴냄)을 출간했다. 그의 첫 책이다. 방한 중인 그를 만나 “왜 테제 수사의 삶을 택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은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대구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서강대에 다니던 1980년대는 억압과 긴장의 시대였다. 그가 하숙하던 신촌 서강대 정문 앞집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이 대입 재수를 하면서 형과 함께 머물렀다. 그는 부산 말씨의 박종철을 조용하고 참 예의 바른 친구로 기억한다. 아침에 수돗가에서 세수할 때면 간혹 먼저 나와있던 종철이는 “행님 먼저 하이소”라고 양보하곤 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은 뒤 그는 부산의 종철이 부모님 댁을 찾고, 사찰의 제사에도 참석했다. 그는 1987년엔 민주화시위 도중 사망한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대학 4학년 2학기 때부터 가톨릭의 <생활성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노숙자와 일용직 노동자, 진폐증 환자 등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 취재를 한 것도 종철이와 한열이가 못다 한 것을 조금이나마 대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테제에서 ‘한열’로 불리는 그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저는 이한열이 아니고 신한열입니다”라며 ‘이한열’을 되새겨주지만, 요즘 청년들은 이한열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서글퍼지곤 한다.
그는 지금도 상처와 아픔의 현장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지난달엔 개신교·가톨릭 청년들과 함께 제주에서 ‘평화와 화해의 순례’를 했다. 그는 제주 4·3학살을 피해 민간인들이 숨어 있던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좁은 천연동굴인 큰넓궤에 들어갔다가 어둠 속에서 바위에 갈비뼈를 부딪혀 골절상을 입었다.
밖보다 더 큰 내부투쟁 시작
그런 그가 수도자의 삶을 택했을 때 고국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도무지 뭐 하고 있느냐”며 아우성을 칠 만했다. 하지만 그는 더 큰 투쟁을 선택했다. 밖을 향한 투쟁이 아니라 내부를 향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끼리끼리만 아니라 타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끝없는 자기 수련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가 테제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한 프랑스 수사가 너무 까칠해 무서웠다. 그는 결국 테제의 지도자인 로제 수사에게 이를 고백했다. 그러자 로제 수사는 그 수사의 힘들었던 삶을 설명해주며, ‘관계의 어려움이 한열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해줬다. 훗날 보니 그 수사는 아픈 형제들 곁을 밤새 지키곤 했다. 겉보기와 달리 따스한 마음도 있는 사람이었다.
“갈등의 대부분이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였다. 10년째 개신교·가톨릭인이 함께 만나는 모임과 한국·일본·중국인들의 청년 모임을 이끌어온 그는 “직접 만나보면, 누군가로부터 들은 편견과 달리 같은 인간이고 그들도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에 대해 갖는 편견도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에서도 무슬림에 대해 가장 배타적인 곳은 무슬림 난민이 가장 적은 곳이어서 무슬림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옛소련 점령지였던 라트비아에서 4개월간 지내면서, “우리나라에서 태극기를 든 노인들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제주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의 순례 중 공동기도. 사진 이주현 제공라트비아에서 노인들이 옛소련 점령 시대를 그리워하는 걸 보았다. 자기들이 그래도 젊은 시절, 무엇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과 일치한다.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 나온 이들도 존재감을 상실해버린 현재가 아니라 존재감 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일 수 있다.”
관계 소통 경청의 기술 필요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 이상을 떼제에서 산 그는 특히 한국인들이 관계에 힘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말할까 등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남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친척들, 가족들간에도 선을 넘지 않은 것이 좋다. 지나친 관심과 간섭이 관계의 피로를 가져온다. 건전한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를 이를 ‘거룩한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또 하나는 표현이다. 물어보거나 들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 ‘그걸 꼭 말로 해야하나’며 상대가 다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기대를 높이는 것도 필시 실망과 상처로 이어질 수 있다.”
그가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질문과 의문과 회의다. ‘나는 하느님이 있는지 모르겠다’거나 ‘도무지 기도가 안된다’는 말도 꺼내놓도록 한다. 그는 깊은 신앙보다는 질문을 가지고 테제에 오라고 권한다. 그리고 어떤 질문이든지 하라고 한다. 그는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조차 모든 질문에 시시콜콜 답해주지않는다고 말한다. 삶은 너무도 복잡하고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따. 세월호 사건과 역사의 고통들에 대해, 어떻게 교리문답하듯 답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답 없이 같이 앉아있어주고, 같이 아파해주고, 함께 침묵해줄수밖에 없을 때도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질문하라는 게 그의 권유다.
“솔직한 질문이 준비된 답보다 낫다.”
» 매년초 종신서약을 갱신하는 수사들. 사진 테제공동체 제공» 프랑스 테제공동체 공동기도. 사진 테제공동체 제공» 테제공동체에서 동료들과 침묵기도중인 신한열 수사. 사진 이주현 제공
이념갈등보다 더 큰 장애는 무시·차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테제에선 공동기도와 노래, 침묵 말고도 소그룹 대화를 중시한다. 소그룹은 7~10명으로 구성돼 하루 한 시간씩 대화를 한다. 테제가 제시하는 대화의 기술이 남다르다.
“‘베를린이 프랑스의 수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틀렸다고 하지 마라. 내 생각은 다르다고만 말하라. 이곳은 토론하고 논쟁하는 곳이 아니다. 누구의 얘기도 틀리지 않다. 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말고 충분히 들어라. 누군가가 얘기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지 말고 10초씩은 침묵하며 기다리라. 상대에게 반응하지 않고, 자기 느낌을 말하라’고 한다. 대화에서 한 사람이 얘기를 독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선출된 애니메이터(그룹장)의 주요 역할은 너무 장황한 얘기는 중지시키고 골고루 얘기를 하게 한다. 연필을 나눠 주어 이 연필을 넘겨받은 사람만이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북녘 동포 돕기에도 애썼던 그는 이념갈등보다 더욱 큰 장애를 편견으로 인한 무시와 차별이라고 본다.
“강남이 강북을, 서울이 지방을, 한국인이 북한인과 동남아시아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더욱 큰 일이다. 통일도 이념갈등에 매몰된 노인들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만들어갈 텐데, 그들이 편견·차별을 당연시한다면 이념갈등보다 더욱 큰 일이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학생들이 포항공대에서 공부하고, 북한 의대생들이 남한 의대에서 실습하고, 남한의 학생들이 북에서 공부해 서로 만나서 알아가고, 친구와 동창이 되어 벽을 하나씩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기적은 물 위를 걷거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결점과 자기모순을 지닌 우리들이 함께 살아내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