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 영정을 바라보는 원택 스님
“성철 스님은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 근대화, 민주화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는 원력 아래 ‘외길’을 걸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길은 ‘깨달음의 길’이자 ‘회향의 길’이었습니다. 회향 없는 깨달음은 공허하고, 깨달음 없는 회향은 무모하다는 것을 성철 스님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스승 성철(1912∼1993)스님의 깨달음을 다시 회향하는 순례기를 펴낸 원택(69) 스님을 만났다. 그는 작년 3월부터 매달 한번씩 순례단과 함께 성철 스님이 머물며 수행했던 25곳의 도량을 찾아 순례기 <이 길의 끝에서 자유에 이르기를>(조계종 출판사 펴냄)를 냈다.
이 책은 가야산 백련암에서 젊은날 한 때 성철 스님 곁에서 수행했던 전 <부산일보> 이진두 문화부장이 <불교신문>에 연재한 글에, 원택 스님이 성철 스님과 인연을 맺은 흥교·인각·지환·종진·혜총·정광·대원·도성·혜국·원각 스님 등 10명을 직접 인터뷰를 더했다. 성철 스님 생전 20여년, 열반 뒤 20년 한결 같이 시봉한 성철 스님의 삶과 수행을 두고 그가 한 인터뷰가 남다른 관심을 불러온다.
그는 지난 2001년 베스트셀러 <성철 스님 시봉 이야기>를 통해 놀라운 필력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후 펜을 들지않은 채 성철 스님의 유지를 선양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일에만 충실했다. 그러나 그도 이제 고희를 앞 두 시봉을 받을 나이다. 그런데도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낸 이번 책을 두고도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린 꼴이어서 부끄럽기 그지 없다”고 겸연쩍어하는 ‘시자’다.
풍전등화의 선맥을 살리려 분전했던 성철 스님이 단기필마로 조조의 100만 대군에 맞선 관운장같은 용장이었다면, 그는 피흘리는 전쟁터에서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않고 치료해주는 어머니 같은 풍모다. 성철 스님이 한국 불교의 맹주로 일컬어져온 고려 고승 지눌 보조 선사까지 물어뜯으며 취모검을 휘둘렀다면, 그는 성철 스님의 경쟁자나, 반론자들까지 세미나에 불러내 오히려 성철 스님의 장삼 자락을 더욱 넓히고 있다.
가야산의 호랑이 성철 스님
성철 스님 생전 20여년, 열반 뒤 20년 시봉한 원택 스님
성철 스님이 은해사 운부암에서 만나 평생 도반이 된 동갑내기 향곡 스님을 만날 때마다 싸운 얘기를 들려줄 때도 마찬가지다.
“둘도 없는 친구인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산이 어딘가를 놓고 싸웠어요. 향곡 스님이 ‘니 설악산 공룡능선 가보기나 했나? 산은 뭐니뭐니 해도 설악산 공룡능선이 최고다’고 하면, 성철 스님은 ‘니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도 못 들어봤노? 금강산이 최고다’고 티격태격하곤 했어요. 그런데 실은 향곡 스님은 설악산만 가보고 금강산을 못가봤고, 성철 스님은 금강산만 가보고 설악산을 못가본 분이지요.”
천하의 선지식들이 자기가 가본 산만이 최고라고 어린아이들처럼 싸웠다는 것이다.
그는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를 맞아 법어 서화전 및 사진전과 학술세미나 개최하고 10월19일에는 해인사 경내 부도탑에서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한 삼천배 기도회’를 열 계획이다.
그는 2년째 진행해온 성철 스님 수행처 순례의 대미를 금강산 신계사에서 장식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성철 스님의 대비심으로 금강산과 설악산의 물이 동해에서 하나로 어울리기를 기대하면서.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