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 사는 동안 궁금했던 것 중의 한가지는, 무슨 연유로 이 나라 사람들은 그리도 일찍 짝을 찾아나서고, 때와 곳을 가리지않고 몸으로 사랑의 표현을 해야하는가 였습니다. 마치 늘 배고프고 목이 마른 듯하다는 느낌이 어렴풋했는데, 제가 스스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유치원과 학교등을 통해 깊이 깔려있는 문화의 차이를 보니 납득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북유럽과 독일엔 전통적으로 아기를 업고 일한다거나 안고 다니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정도 부터 달라진 면도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갓난 아이조차 엄마 곁이 아니라 침구에 따로 누이고, 여유가 있는 집에선 다른 방에 재웁니다. 정해진 시간에 젖먹이고 정해진 시간에 놀이터에 가고, 정해진 시간에 겨울이나 해가 긴 여름이나 무조건 자게합니다. 밤에 자다 깨어서 아무리 울어도 엄마의 품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은 스스로 체념을 터득하며 ‘강인’해지도록 훈련받습니다. 두런두런 엄마가 손님과 얘기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던 그런 기억은 독일 친구들에게는 없더군요. 손님들이 오면 아이들도 신나하고 서로 뒤섞여 놀다가 여기저기 쳐박혀 잠이 들면 들쳐업혀 집으로 가곤하는 했는데, 그런 모습은 독일에선 보기 어렵습니다. 아이와 어른은 늘 따로 따로 입니다.
우리 말의 ‘엄마’인 ‘마마’는 원래 라틴어로 ‘젖’입니다. 새끼 원숭이가 엄마 원숭이에게 딱 달라붙어 젖을 빨며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이동하는 모습을 ‘동물의 세계’에서 보셨겠지요? 산업화가 200년 밖에 안된 소위 선진국의 현대인들은 그건 미개한 모습이라고 치부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의 등에, 옆구리에, 가슴팍에 붙어서 뱃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람 새끼도 원숭이 새끼도 두 발을 떼고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의지하면서 세상을 배웁니다.
인간으로 생겨나 첫 열달을 엄마 뱃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더이상 지낼 수 없이 좁아진 뱃속을 떠나 세상으로 나올 때 그 허전함이 어떨지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서양이 아닌 많은 문화권에서는 갓난아이를 꽁꽁 싸고, 업고서 모든 일을 했습니다. 꼭 엄마가 아니더라도 대식구인 집안에서는 누구라도 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었지요. 충분히 젖을 먹은 아이는 아무리 젖꼭지를 들이대어도 더 먹지 않는 것 처럼, 충분히 보호감을 느낀 아이는 서둘러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정서불안과 행동장애가 많은 아동들과 청소년의 심리를 연구하다 유아의 성장발육에 중요한 것으로 ‘패팅’이라 이름하는 신체접촉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혹은 아빠)의 등딱지나 옆구리에 매달려서 보호받고 있다, 격리되지 않았다는 그 존재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 프랑스의 직장여성들이 잠정적, 만성적인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연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돐도 되기 전에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고 직장일을 하는, 혹은 해야만하는 엄마들이 '본능적'엄마 노릇을 하지 못하면서 오는 우울증이라는 거였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만 엄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도 아이가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유아원에서 잘 한다고 해도 엄마나 가족의 손길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살을 부대기면서 정서적 안정감을 갖추어야 할 유아기에 아이들은 너무 일찍 혼자서 고투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아원에서 일찍부터 사회성을 키운다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을 어린아이들을 유심히 관찰만해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유아원의 증설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 첫 3년동안은 엄마에게 재정적인 보장과 직장으로의 복귀가 보장되어야 아이와 ‘엄마’로서의 여성에게 모두 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선진의 사회라고 믿습니다. 눈앞의 생산성과 성과만을 보는 사회는 제가 보기엔 아직 미개사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