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체성들은 상호 보완하고 서로가 겹쳐질 수 있지만, 서로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정체성도 있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이거나, 키가 크면서 작거나, 미혼이면서 기혼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무슬림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이거나, 가톨릭이면서 개신교이거나, 불교도이면서 유대교일 수는 없다. 물론(초기에) 신앙이 분열되기 시작할 때는 여기저기 혼합되거나 중간에 있는, 예외적인 신앙의 형태가 나타나기는 한다.
그렇게 최근 150년 동안에는 프랑스인이면서 동시에 독일인일 수 없었고, 폴란드인이면서 러시아인이거나, 이탈리아인이면서 스페인인이거나, 중국인이면서 베트남인이거나, 모로코인이면서 알제리인일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의 종교 정체성과 현대의 민족 정체성은 모자나 코트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여러 개를 걸칠 수 없다. 종교(그러니까 더 앞서 등장했던 다신교가 아니라 일신교 전통)와 애국심(전 국가 단계의 이행기, 대이주 상황, 탈민족 감성을 제외하고는)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완전한 배타성을 요구한다. 이 점이 특히 종교와 애국심이 힘을 갖는 특별한 근원이다.
수 세기 동안, 전근대 세계의 종교 정체성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들을 설명하고 거기에 의미를 붙였다. 또한, 유한한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서 천국과 윤회의 형태로 영원성의 아우라를 삶에 부여했다. 이 유용하고 장기적인 서비스를 구실로 여러 교회는 재정적인 보상만이 아니라 자기네가 제공하는 배타적 진리에 헌신할 것 또한 요구했다.
이 진리는 그 성격을 알기 쉬운 정체성 집단 안으로 믿는 자들을 통합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로써 그들의 삶은 이해받고 의미를 부여받았으며 또한 질서와 안정감을 얻게 되었다. 그 개인은 자신이 농부거나 대장장이, 상인이나 행상, 군주거나 노예라는 것과 함께, 또한 자신이 크리스천, 유대인, 무슬림,힌두, 혹은 불교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들 어떤 식으로든 종교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이 없다는 가정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신비로운 장소들을 점령해 가고 `사물의 본질'에 숨겨져 있던 비밀들을 밝혀내면서 인간은 자연, 그리고 자연의 생산물과 자연의 변화에 대한 지배를 넓혀 갔다. 그 결과 전능한 신은 해체되었고, 무엇보다 민중들의 삶에 있어 지상에 있는 신의 대리인들은 정당성을 잃었다. 전통적이고 제도화된 종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종교가 인간 사회 전반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사회생활의 윤리적 규율을 담당하게 될 새로운 집단 정체성이 자라났다. 산업화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시장 경제가 성장하며 그 정점을 찍었을 뿐 아니라, 인쇄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소통 수단이 현대화되는 강력한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계급 관계의 구조에 주요한 변화가 생기면서, 민족 정체성은 정신적 폭우가 쏟아지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피뢰침이 되었다.
이 새로운 집단 정체성이 필요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평적이고, (도시화에 따른) 수직적인 (사회 계층을 동반한) 이동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질의 대중문화를 요구하는 분업과 그와 함께 점점 증가하는 노동 파편화 역시 언급해야 한다. 민족 국가는 대중들이 민족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끌었다. 민족 국가 없이 민족화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민족 국가는 효율적인 공공 및 민간 커뮤니케이션 망에 의지했고, 특히 19세기 말부터는 의무 교육이 가능한 두 기관, 즉 국가 지정 교육 기관과 군국주의 목족을 가진 군대에 의존했다.
이 새로 등장한 민족 정체성은 대개 이전의 종교 정체성을 흡수했다. 민족 정체성은 종교적 상징과 예식 일부를 도용하여 새로운 집단 정체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민족 정체성이 이런 상징과 깃발들을 완전히 세속화시키면서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신비하면서 때로는 무지한 과거와 계속해서 접합하는 것은 여전했다. 특히 영혼에 관한 형이상학 영역 등의 몇몇 부문에서 전임자인 종교 정체성보다 내용이 빈약했던 민족 정체성은 아주 대담하게 다른 부분에 눈을 돌렸다. 광범위한 대중 동원, 지지자들에게 관대하게 분배된 조국의 동등한 소유자라는 감성이 강조되었다. 종교와 민족 정체성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주권이라는 개넘과 관련이 있다. `순수한'신자들에게 주권은 언제나 그 개인의 정체성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에 `민족 정체성'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에게 주권이라는 감성은 정체성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옛 군주와 우주의 주인이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한 것은 국가이다. 국가가 행위의 주체이자 책임자로서 등장했고, 그렇게 주된 숭배의 대상이 됐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민족 정체성은 놀라운 세력을 끌어모았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조국을 방어하거나 확장하기 위햇 기꺼이 목숨을 내걸라고 요구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조국을 방어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걸라고 요구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언어와 삶의 방식을 부여했다. 민족 정체성은 이렇게 역사상 전례 없이 강력한,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연대를 일으켰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역사를 민족화시켰고 이러한 방식은 현재의 애국적인 필요에 들어맞았다. 민족적 기상 세계는 항상 오랜 이야기의 형태를 취한다. 전설, 위대한 행동, 특정 부족 신화, 종교 공동체들, 왕국들이 하나의 길고 일관된 내러티브로 변형되어 가상 세계의 민족들이 태초부터 존재했음을 주장했다. 국가가 탄생한 순간부터 흐르기 시작한 신화적 시간의 연속성에서, 그 신비롭고 분절된 상들이 허구적인 근거로 이용된 것이다.
우리에게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떠라면 학문으로서의 역사학(나의 생계를 잇게 해주는 그 학문)을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그렇게 지속적이고 한결같이 배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유주의적이든 전체주의적이든 간에 모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학생이 자신이 속한 `민족'의 역사를 읊어야만 한다. 역사의 뮤주인 클리오는, 근대 민족이 집단 정체성을 북돋고 그들의 믿음을 국가라는 정치적 대리 기구에 봉인할 목적으로 신봉하는 여신이 되어 버렸다.
19세기 말 반유대주의가 널리 퍼지며 성장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기인한 인종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대 후손의 분파는 저절로 민족화 단계를 겪었고 심지어 자체 인종화까지 이르렀다. 이 현상은 고대 신화와 전설을 새롭게 살려냈고 새로운 형태의 세속적 정체성들을 만들어 냈다. 한때 남성들은 키파(유대인이 쓰는 작은 챙의 둥근 모자)와 탈릿(기도할 때 스는 숄)을 갖추고 수염을 길렀으며, 여성들은 머리를 밀고 가발을 썼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는 이러한 관습들이 거의 사라지고 `종족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새로 등장한 유대인의 일부가 열광적인 시오니스트들이 되었다. 다른 이들은 유대 민족 정체성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을 비방하는 자들의 본질주의자 관점은 받아들였다.
만일 최근까지도, 그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한 유일신을 숭배하는 일이나, 고집스럽게 종교적 정언을 따르고 일련의 기도를 수행하는 행동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역사는 현대적인 정체성 정치 분야에 놀랄 만한 허상을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반유대주의자와 친유대주의자 모두의 눈에 유대인이란 그 사람이 따르는 문화적 관습이나 규범에 상관없이 항상 유대인이다. 그 개인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만들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안에 타고난 영원하고 신비로운 본질 때문에 유대인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세계 각지의 시오니스트 과학자들은 유전학까지도 도입하고 있다.
<유대인, 불쾌한 진실>(슐로모 산드 지음, 훗 펴냄)에서
슐로모 산드
1946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홀로고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었고 그 자신 역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트인인들을 학살하고 몰아내던 시기인 1947년 이스라엘로 이주한 나크바동이였기에 그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6일 전쟁의 예루살렘 점령 당시 군인 신분으로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끼고 급진적 좌파가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산당이 학살에 동조하고 당 내에서 이에 반대하는 아랍계 구성원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공산당 청년 조직 역시 탈퇴했다. 1975년 프랑스로 가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종신 교수로서 텔아비스 대학에서 현대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유대인의 발명>, <이스라엘 땅의 발명> 등이 있다.
이스라엘 국적의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국가와 시오니스트들이 내세우고 있는 `유대 국가'라는 정의를 비판하며 그 기반이되는 유대인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