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암자의 마당과 방을 보신 분이라면 차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내게 어쩌면 그리 안과 밖이 다르냐고 핀잔을 한다. 내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 힘든 일은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이다. 하기도 싫으니 자연히 몸도 잘 따르지 않는다. 청소 자체를 싫어하는 그런 내가 들일은 매우 좋아한다. 시골 태생이라 그런지 어린 시절 부모님 일손을 도우면서 일하는 의미와 보람이 몸에 스민 탓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일하는데 원 없이 몸을 맡기는 쾌감을 누리기도 한다.
일지암에 깃들면서 조그만 텃밭을 만들었는데 볕이 잘 들지 않아서인지 결실이 고만 고만하다. 그래서 작년부터 두륜산 너머 차여사네서 틈틈이 품앗이를 하고 있다. 남편 김주호, 부인 차혜경, 아들 김영렬 농군 삼총사가 살고 있는 집이다. 이 차여사 댁에는 나 말고 비상근 농사도우미들이 있는데, 그들을 소개하자면 작곡은 3천곡 이상을 했고 노래는 시처럼 깊고 감기는데 크게 히트한 곡은 없는 작곡가 한보리, 테너로 출발했는데 소리가 좋아 소리꾼이 된 이병채, 설장구로 마당을 휘감으며 사람을 홀리는 이우정, 전시 기획자이고 일지암 숲속 도서관 지기 윤정현, 시와 인도의 혼에 접신된 가수 박양희, 그리고 박양희의 오빠 건축가 박구영 등이다. 그 중 나는 자천으로 작업반장이다. 차여사댁에 일거리가 생기면 나는 이들에게 이런 문자를 보낸다. “나는 모월 모일 모시부터 모시까지 차여사댁 밭에서 감자 수확에 동참합니다.” 다만 이렇게 알려만 줄뿐, 절대 일손 돕기에 참석하라고는 한마디도 안한다. 오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이들은 당연하듯 일꾼 차림으로 밭에 나타난다. 그리고는 기어이 한마디 거둔다. “스님이 보이지 않는 강요와 심리적 압박을 주고 있다고” 사실인즉 맞다. 그들은 아마도 진종일 폭염과 뙤약볕 아래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기쁜 동참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몸이 힘들어서 몸이 행복한,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노동의 역설’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여름의 농사일은 아침 6시부터 시작한다. 더 빠르게는 5시부터 시작하는 농군도 있다. 비교적 덜 더운 시간에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먼저 마늘을 이틀에 걸쳐 캐고 사흘간에 걸쳐 감자 캐는 일이 이어졌다. 강한 햇볕과 더불어 가뭄으로 메마른 밭에 먼지가 불어 눈은 따갑고 코는 매캐해서 더 힘들었다. 승복 대신 작업복을 입으니 함께 일하는 동네 할머니들이 스님인줄 알 리가 없다. “애 보쇼, 아자씨! 마늘 다듬기 쉽게 한군데로 모아주면 고맙것소, 아따! 도시 사시는 것 같은디 젊은 양반이 그래도 일을 좀 하요” 익명의 자유로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벗어나 서로 일하는 사람으로 마주하는 소탈한 관계가 참 좋다. 옆에서 일하는 차여사가 씨익 웃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천백억화신이라고 한다.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은 서른 두가지 몸으로 중생 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처지와 요구에 따라 적절한 역할과 모습을 보임을 일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무 농사꾼 보살 마하살!
일을 하다 보니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온몸이 땀과 소금기로 가득하다. 힘들다, 지친다, 등골 빠진다 등의 말들이 비로소 가슴에 맺힌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절절하게 가슴으로 느끼는 그 자리에 바로 깨우침이 있다. 더불어 일하다 보니 즐겁고 행복한 말도 한 가득이다.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고 밥도 꿀맛이다. 서로 힘을 보태는 순간에 나오는 고맙다는 말이 마음에서 절로 우러나온다. 함께 일하고 함께 밥을 먹으니 참말로 고맙고, ‘함께’라는 말이 이토록 살갑고 사람 사는 재미가 있는 감자밭이다.
올 해 감자 농사는 오랜 가뭄 때문에 수확량이 작년의 절반이다. 농사에서 물이 갖는 절대적인 비중이라니. 어디 물이 감자에만 소중한 자양분이겠는가? 물과 바람과 햇볕과 흙과 미생물들의 협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씨앗을 심어도 결실을 맺을 수 없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뜻이다.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일이 자연과 다른 생명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대부분이 지식으로는 알고 있고 머리로만 수긍한다. 가슴에 맺히고 가슴이 울리는, ‘말’들을 실감하고 절감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늘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연의 이치를 교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나도 농사일을 거들면서 새삼스레 실감하고 있다.
한창 일을 하다 허리가 아플 쯤 객쩍은 농담과 수다도 고됨을 더는 청량제이다. 이병채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는 차여사 아들 영렬이가 두륜산을 뒤로 하고 들판에서 내지르는 사철가 한마디에 절로 흥이 솟고 일하러 오신 할매들이 들려주는 해학 가득한 음담패설(?)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시원하다. 그렇게 우리들의 농사일은 힘겹게, 흥겹게 넘어 간다.
같이 일하던 장구의 명인 이우정 선생이 한마디 하신다. 자기는 공연에 가서 대략 10분에서 20분 정도 장구를 치고 신명나게 놀아주고 공연비 받고 돌아오는데, 농사일 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자기보다 훨씬 낮은 품삯을 받는 걸 보니 마음이 좀 그렇다고 한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듣자니 나 또한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나도 강의 나가면 1시간 강의에 최소 2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받는다. 한두 시간 정도 글을 써도 20만원 정도의 고료가 들어온다. 함민복 시인은 ‘긍정적인 밥’에서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뙤약볕 아래서 8시간 일하고 8만원에서 10만원인데, 노동은 저리 무겁고 돈은 이리 가볍다. 저마다 노동의 가치가 다르다고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무언가 불공평한 것 같고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고 그들의 수고 앞에서 겸허해진다.
일을 마치고 감자밭 사장님 차여사는 품삯으로 남도 밥상을 가득 차려 주었다. 또 쩌 먹는 수미 감자를 모두에게 푸지게 안겨주었다. 이래저래 몸은 힘들고 농군들의 처지에 마음은 편하지 않아도, 그래도 우리가 그렇게 마음 모으고 손을 모아 거둔 감자에는 서사가 있다. 암자에 찾아 온 벗들에게 감자 캔 내력을 말하며 포실한 감자 공양을 올리는 기쁨이 있다. 손자(내 막내 누이의 외손자)에게 할아버지 스님이 니네들 멕이고자 일해서 얻은 감자라고 하며, 목구멍으로 가슴으로 사랑을 심는다. 강한 냉풍으로 시원한 대형 마트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감자에는 다만 가격표가 있을 뿐이다.
내력과 사연이 남다른 감자
그래서 맛도 다르다
그래 그래,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래서 우리는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