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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면 더 풍요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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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일 때 더 풍요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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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차야. 그러니까 누구는 타지 마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사진: 정동철 제공)  어느 부잣집 풍경?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다. 우리 아이는 셋인데, 대충 눈에 들어오는 애들만 대여섯 명이다. 시선을 TV에 고정한 채 옆머리로 인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TV가 귀하던 시절 부잣집 대청마루에 모여 함께 시청하던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다 몇몇은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가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가족 간의 저녁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토라 아내는 서둘러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우린 부자다.’ 공사 현장에서 LCD패드에 줄무늬가 생겼다고 내다버린 32인치 TV가 우리 집을 부자로 만들어준 거다. 자본주의는 부자의 조건을 물질에 둔다. 그 렌즈로 우리를 보면 한없이 초라해진다. 현대인은 개별 가구에 남부럽지 않은 가전으로 가득하다. 소유한 모든 것이 충분한 기능을 다하고 있음에도 빈곤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내가 소유한 것의 수명이 충분하지만, 신제품이 계속 출시되고, 이웃에서 누가 그것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이기는 비결

사실 우린 최상의 상품들을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물질과 기술은 우리의 만족감과 이해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소비자들이 더 많은 발전을 기대하기도 전에 기업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기술 개발의 가속패달을 힘차게 밟는다. 하지만 다수의 현대인은 최고의 기술보다 적절한 기능이 구현되는 저렴한 기술에 만족한다. 중고시장의 급격한 성장, 1000원 몰의 인기, 중국산 저가 전자제품이 전 세계를 강타하는 것이 그 증거다. 그야말로 적정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본래 적정기술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을 지원하기 위해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적정기술 분야에서 과학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우리 교회 손문탁 박사님의 말을 빌리자면, 적정기술은 가성비와 관련된 것이란다. 사용자가 원하는 가격에 사용자를 만족시키는 기술, 그것이 적정기술이라는 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상대적 개념의 비교 의식은 허세를 조장한다.

 

물질 풍요의 시대에서 가장 좋은 것과 빈곤의 상태가 공존하며, 둘 사이의 골이 깊은 상태를 양극화라 부른다. 과거에는 사회 전반에 인프라가 부족했으므로 이웃 간에 심한 박탈감은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그 격차가 심각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절대적 빈곤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가중되어 가고 행복감은 추락했다. 여기에 힌트가 있다. 이것은 상대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설정한 비교 대상에 따라서, 또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감정은 박탈감과 행복감을 넘나들게 된다. 그렇게 감정을 넘나들게 만드는 대상을 준거집단[準據集團]이라고 부른다. 준거집단은 개인이 자기의 신념이나 태도, 가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표준으로 삼는 집단이다. 생각해보면 개인이 표준으로 삼는 집단은 멀리 있지 않다. 비교할 만한 사람들을 자의로 설정하여 그들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에 간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기업 사장이 최신형 신차를 구입해도 관심 없다. 오히려 옆집 아저씨의 최신 휴대폰에 새로 장착된 기능에 침을 흘린다. 이웃집 아이들의 값진 장난감에 눈이 돌아가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페이스북에 올라 온 친구들의 여름휴가 사진을 보면서 초라함을 느낀다. 자매들은 결혼식을 갈 때마다 교복 같은 단벌 정장만 입는 것에 마음이 무너지고, 친인척의 경조사에 얇은 봉투로 동참하는 데 미안함을 느낀다. 이것이 준거집단이다. 공동체로 모여 산다는 것, 그걸로 모자라서 올인 공동체까지 도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 불렸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만의 준거집단을 확고히 형성했다. 세상은 특이한 그들만의 삶의 형태를 조롱하다가 시기하게 되었고, 시기하다가 추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성이 무너진 한국교회는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조직이 되었다. 세상을 사랑하니 세상의 경영방식과 물질주의와 계급주의가 교회의 문턱을 넘었고, 세상이 준거집단이되어 그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고스란히 함께 겪고 있다. 양극화, 가족붕괴, 교육붕괴, 농촌붕괴, 청년실업, 세대갈등과 같은 사회문제가 교회에서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공동체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를 충분히 나누고 우리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 결정된 삶의 형태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외부의 풍토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준거집단이 되어 우리의 모든 열악함을 자랑하고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훈련한다. 특히 물질과 관련해서는 검소한 삶을 추구한다. 우리의 적정상태를 찾아가는 것이다. 공동체 차량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를 잘 반영한다.


재정을 합치고 난후 차량도 공동소유했다. 그중 한 대가 노후되어 폐차한 후 새로운 차량을 구매해야 할 상황이 왔다.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연비와 유지비가 저렴해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졌고, 그 기준만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차를 사는 것이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 중 아무도 신차를 구매해 본 경험이 없는 터라 자동차 매장에 가서 시승도 해보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런데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차량이 공동 소유이다 보니, 여러 사람이 운전을 하게 되고 뜻하지 않게 경미한 사고를 낼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서로 마음에 큰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이미 많이 낡은 차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차일 경우에도 과연 그럴까? 지금처럼 자유롭게 공유하고, 또 사고가 나더라도 마음 편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없었다.

 

수년 후 상태가 아주 좋은 16년 된 SUV가 공동체에 들어올 때도 연비와 유지비 기준에 걸려서 1주일 간 논의를 했다.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지만 차값이 100만 원 밖에 안 되었고,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장거리용 차량이라 인정되어 간신히 구매청문회를 통과했다. 공동체는 쉬운 게 없다. 그러나 가성비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생각하며 결정한다. 이를 통해 우리 욕심이 즉각적으로 채워지는 것보다 기다림을 통해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며 단순한 삶을 배운다.

 

공유는 아이 어른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

검소한 것은 미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더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것을 물질로 가득 그리고 즉각적으로 채우는 것이 행복이라고 자본주의는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삶을 꿰뚫는 성경의 견해는 다르다. 물질로 인한 염려,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을 경계한다. 우리 인생의 풍요는 일용할 양식 위에 놓여 있고,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꽃들의 유유자적함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절제는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게 한다. 단것을 별로 먹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시럽으로 된 감기약의 단맛에 감격하는 것처럼 궁색해보였던 절제의 힘이 행복감으로 나타나게 한다.

 

어느 날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집에서 놀다와서 이런 애기를 했다. “엄마, 우리집은 가난한 집이지?” 아파트의 규모와 꾸며진 것들이 아이들 눈에도 단박에 비교되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 아이들은 아파트 평수에 따라 함께 노는 무리를 나누고 차별한다고도 한다. 바퀴달린 신발을 신은 애들과 안 신은 애들을 나누기도 하고, 또 용돈 규모에 기가 죽는다. 아이들은 자기가 금수저인지 흙수저인지를 금방 알아차린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린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아니!! 우린 가난하지 않아.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 그 이상은 의도적으로 가지지 않는 거야. 너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사줄 수 있단다. 가끔은 사치스런운 것이라도 괜찮아. 다만 우린 이렇게 사는 것이 좋다고 결정했고, 돈이 많아도 필요 없는 것에는 쓰지 않기로 했단다.”

 

이렇게 말할 때 준거집단은 올인멤버 가정과,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유금리 마을공동체 가정들이다. 아이들은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사실관계를 확인한다. 별다를 바 없는 살림살이들, 먹거리들, 용돈 규모, 몇 번을 되물려 입은 옷가지들을 보며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길러진다. 몇 년 전 우리 아이들이 입던 옷들을 동네 꼬마들이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의 어린 시절 영상을 보는 것 같다. 아이들은 으레 작아진 옷들을 누구에게 줘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엄마, 이거 ◯◯이 줘야겠어. 이젠 안 맞아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주택을 공공과 개인의 영역으로 나누듯 삶의 전반이 그러하다. 공유하는 것이 많으면 개별 가족은 자연스레 검소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별 공간은 20평을 넘지 않게 하되 공용공간인 커뮤니티 센터, 큰 주방, 예쁜 카페, 방대한 잔디밭과 테라스, 유용한 텃밭, 감동적인 숲이 보장된다. 어떤 것도 내 것은 아니다. ‘우리 것이며 더 넓게는 함께 사는 10세대의 인프라이고 지역사회에 열린 공간이다. 이런 정신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소유욕이 강한 시기에 혼란과 소통을 통해 새로운 습관이 양성된다.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이들의 습관이 빛을 발한다.

 

아이들은 보통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심한 경우 똑같은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큰 싸움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같은 장난감을 피하고 싶어 한다. 어른들이 선물을 사줄 수밖에 없는 날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미리 서로 다른 선물을 받기로 말을 맞춘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 아이에게 물어보면 그건 뒷집 애가 살 거라서 안 된다고 참견을 한다. 선물이 도착하고 나면 내 것으로 호사를 누리는 시간은 얼마가지 않는다. 물론 누구의 물건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집 저 집을 순회한다. 비단 아이들의 장난감뿐 아니라 우리 소유의 대부분이 공유되고 또한 검소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두 달 전 올인멤버의 형제들이 여러 논의 끝에 함께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생각되어 그동안 폐업 상태이던 디자인 잇다를 회생시켰다. 공동체 집을 리모델링하던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그런 우리에게 적절한 일거리들이 들어왔고 당장 트럭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차량구매는 국회 인사청문회만큼 어려운 과정이 예고되어 있다. 그러나 목돈이 없는 관계로 신차를 구매하는 데 쉽게 동의가 되었다. 공동체의 첫 신차다.

 

한 달도 넘는 기간을 기다려 차가 출고되었을 때 공동체 아이들이 광택이 나는 신비로운 트럭을 타려고 몰려왔다. 나는 아이들을 모두 태우고 한적한 도로를 1km쯤 주행했다. 그때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이거 누구차야?” 그러자 좀더 큰 애 하나가 대답했다. “, 이건 우리차야. 그러니까 누구는 타지 마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어지는 질문도 없었다. 우리 것에 대한 이해는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체득되는 것이므로 어린 시절부터 공동체로 살아온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 우리 차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은 궁핍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공유를 통해 훨씬 더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공동체 아이들 의식 속에 우리는 자동차가 6대가 있고 피아노가 3대 있으며 카페와 목공공방과 넓은 잔디밭과 숲을 보유한 집에 살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도대체 너희 부모님은 뭐하는 분이니? 물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우리가 결정한 대로 잘 살고 있는 거다.

 

공동체는 개인적인 부분과 공유되는 부분의 긴장점이 없이 풍요롭다고 여기는 지점이 어디쯤인지를 계산한다. 유기적인 삶은 이를 자주 들여다 보며 지점을 변경해야 한다. 지난해의 지점과 올해의 지점은 전혀 다른 곳이 될 수 있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나눔은 더 자연스러워지리라 기대한다.

 

내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내 것이 아니므로 더욱 소중하며 작은 것에 신중하되 큰 것을 나눌 줄 아는 삶.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날마다 계산하며 훈련하는 우리보다 더 잘 해낼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공동체였으니 말이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대표로 일하면서, 몸된교회 전도사로 섬긴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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