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소외다. 소외란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 세계의 모든 것이 –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물건들, 사회 제도나 문화 현상들, 자연계, 그리고 종교 등 – 마땅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인간을 위한’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의미를 상실하고 나와 무관하고 무의미한 물체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사물화 현상을 가리킨다. 인간 주체와 끊임없이 교섭하고 교감하면서 살아 움직여야 할 대상들이 경직된 죽은 물체처럼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 자신도 대상계에 관여하면서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게 되어 정상적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자기소외를 겪게 된다. 대상계가 의미를 상실한 채 아무 말 없이 거대한 물체로 변해서 우리를 가만히 지켜본다. 의미가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우리도 그냥 무관심하게 쳐다 볼 뿐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우리 주위의 사람들도 타자처럼 느껴진다.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타자화 되고 비인간화 된 인간관계를 ‘나와 그대’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표현했다. 인간은 이제 각자 자기 자신에 갇혀 고립된 삶을 사는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더 이상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무상이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악이 아니라 바로 삶과 존재의 무의미성이다.
인간소외의 가장 대표적인 삶의 영역은 의외로 종교의 세계다. 우리는 종교에 심취한 사람, 종교가 사회생활의 전부가 되다시피 한 사람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신앙심이 깊다는 것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종교가 삶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사람이 종교의 노예가 되어 종교를 위해 살다시피 하는 데 있다. 종교가 한 사람의 이성적 사고나 비판적 의식을 철저히 마비시켜서 그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문화생활을 못하게 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사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종교에 의해 철저히 지배받고 조정 받는 타율적 인간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도 많지만, 우리사회에는 이렇게 종교에 의해 소외되고 비인간화된 사람도 허다하다. 특히 한 종교 지도자에 의해 ‘몸과 영혼’이 완전히 지배를 받은 사람이 지금 감옥신세를 지고 있는 유명한 사람 말고도 허다하다. 종교의 노예가 된 사람들,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순명’의 이름으로 복종하는 사람들, 마치 무슨 강박증에라도 걸린 듯 똑 같은 종교 의례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리를 아무런 생각 없이 맹신하는 것을 신앙인양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인간의 말을 신의 말씀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말씀에 비추어 인간의 온갖 편견과 거짓을 식별하고 고발하는 데 있다. 경전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거나 심오한 교리를 뜻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 혹은 그 너머로 들리는 영적 메시지를 들으려는 것이 신앙이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정신이다. 종교의 사명은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의 소음과, 편견을 조장하는 인간의 언어를 돌파해서 신의 음성을 듣고 세상과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이 확 바뀌고, 나아가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이런 힘이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존재 가치나 이유가 없는 종교일 것이다.
종교에 의한 인간소외를 막으려면 우선 종교라는 것이 신이 제정해준 절대적이고 성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일단 접어야 한다. 종교도 세상의 여느 사회 제도나 문화 현상처럼 우리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경전이 제아무리 일반인이 이해 못할 성스러운 고대 언어로 쓰여 있다 해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사용한 언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다. 신이 마치 우리 인간처럼 입이 있어서 특정인에게 불러 쓰기를 시킨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신성한 경전이라 해도, 학자들은 그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역사적 조건 하에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신앙인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맹목적인 경전 숭배를 벗어나 경전의 우연적인 요소들과 부차적인 것들을 넘어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전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 여타 사물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상황에서 쓰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무조건 믿어야 된다는 ‘묻지 마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런 사람의 말을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 좋다. 가령 성경이 하느님의 계시나 말씀을 담고 있다 해도, 이 계시가 우리를 위한 말씀이 되려면 여전히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어야만 한다. 신이 마치 인간처럼 입이 있어서 한 말을 누군가가 듣고서 고대로 받아쓰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에 의한 인간의 비인간화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전을 신처럼 절대화하거나 숭배하는 문자주의 신앙에서 온다. 좀 더 본질적으로,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적 실재 자체가 인간소외를 조장하기 쉽다. 가령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의 세계를 엄격히 구별하는 유일신신앙의 경우, 인간의 지성과 이성, 건전한 상식과 판단능력, 자유와 창의성을 전지전능한 신에게 모두 돌리는 한편, 현세에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몽땅 내세나 천상의 세계를 위해 양도해버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소외를 조장하기 쉽다. 그런가 하면, 만물과 인간의 내면 깊이에 현존하는 신의 내재성을 강조하며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를 강조하는 동양종교들은 ‘참나’를 실현하기 위해 영적 수행을 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억압하는 지나친 금욕주의로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종교의 세계가 이렇게 주체와 객체의 분리나 대립, 양자의 상호성의 회복과 화해의 시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영성은 이러한 주객의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 절대주체와 절대객체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주체와 절대객체를 한 번도 접해본 일이 없는 사람은 결코 종교의 진수나 영성의 세계를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종교도 이 세계에 발을 붙이고 존재하는 한,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의 지배와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도 인간이 산출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여타 제도나 문물처럼 객체로 존재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타 제도나 문물은 오히려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변해가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생겨난 것들은 성스러운 전통으로 간주되면서 쉽게 변하지 않고 경직화된다. 절대화되고 사물화 되기 쉽고 인간소외를 야기하기 쉽다. 종교에 의한 인간소외는 종교의 불가시적인 측면보다는, 본래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들기에 인간적 의미를 담고 있는 종교의 가시적인 요소들 – 제도, 경전, 교리, 성직, 건물, 각종 의례나 상징물 등 – 을 초월적이고 신비스러운 권위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적 ‘우상숭배’에 기인한다. 종교적 우상숭배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 우상숭배보다 더 위험하다. 성스러운 권위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간파하기 어렵고 비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간이 산출한 객체들임에도, 일단 종교의 탈을 쓰면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것으로 절대화 되고 사물화 됨에 따라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기제로 둔갑하기 쉬운 것이다.
대상계에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은 종교만이 아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비합리적 사회제도나 문화적 관습이나 관행들, 일반인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정치 형태나 정치인들의 작태, 무엇보다도 누구도 벗어날 길 없이 우리 모두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질서가 인간소외의 주범들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돈의 마력과 유혹, 자본의 횡포, 거대한 생산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온종일 단조로운 일을 기계처럼 반복해야 하는 임금노동, 상상조차 못할 인격 모독을 허용하는 갑을 관계들, 이런 것들이 모두 인간을 비인간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괴물이 현실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고용 없는 성장’의 딜레마에 빠져 탈출구를 못 찾고 있는 세계경제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종교든 예술이든, 친구든 친족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관계 어디나 파고드는 돈의 힘과 경제논리,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이 인간소외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상업화된 문화산업과 각종 이벤트, ‘힐링’은 물론이고 각종 명상과 ‘영성’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골행이나 귀촌을 감행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도 별 수 없을 것 같고, 별 수 있다 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된다. 그나마 크든 작든 자기가 하는 일에서 돈벌이 이상의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는 행운아에 속한다.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 저녁이 있는 삶을 외치지만 구호에 그칠 뿐, 민초들의 고달픈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인간소외의 문제를 의식하는지 고객감동의 경영, 감성 마케팅, 사람 냄새가 나는 제품, 진정성이 느껴지는 서비스 등 구호를 외치고 각종 문화강좌나 인문학강좌를 통해 고객을 끈다.
이 글이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비관적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동기야 어떻든, 위와 같은 노력들이 그나마 우리 삶에 작은 활력소가 되고 우리 사회를 조금씩이라도 밝게 만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과연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인간으로서 의식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소외가 소외인 줄을 알아야 점점 더 비인간화 되고 있는 현대문명에 돌파구는 아니라도 작은 구멍 하나 틈새 하나라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냥 남들 하는 대로 적당히 따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체념해버리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다. 영원한 국외자로, 방관자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며, 아니면 고작해야 혼자 잘났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모습은 생각지도 않고 무슨 일에든 반대와 비판만 하는 냉소주의자다. 대체로 ‘지성인’을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그나마 자본의 논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야 할 우리 삶의 성역이 있다면, 나는 그래도 교육과 종교를 꼽고 싶다.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려는 것이 교육과 종교의 근본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무너지면 정말 우리 사회, 우리 문화는 희망이 없을 것 같다. 무너진 지 이미 오래라고, 그래서 이제는 ‘구제불능’이라고 항변하는 소리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2000여 년 전에 이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고 위대한 인간해방의 선언을 하고 치열하게 운동을 벌이다가 비명에 간 한 청년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