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아들을 용서하기까지, 노교수의 인생 여정
서광선 명예교수 1945년 8월 15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8월 7일 서울 수유동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열린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추모 모임'에 초대되어 이야기한 내용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원고 전문을 싣습니다.
1931년 4월 15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88선언’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만주 산언덕에서 맞이한 8.15
» 서광선 목사 겸 이화여대 명예교수
저는 1945년 8월 15일, 8.15 날 저 만주의 한 도시 산언덕에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만주에 아버지가 식구들을 끌고 망명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압록강 근처에서 교회 전도사로 시골 교회를 개척하는 고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 교회목사님들과 전도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전도사는 왜 일본 귀신들 앞에 가 절을 해야 하나, 우상을 섬길 수 없다고 반항했습니다. 경찰에 끌려가 매도 맞고 별아 별 수모를 당하다가,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일 전도사였습니다. 뼛속 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증오하는 애국자 전도사였습니다.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할아버지는 고종 밑에서 무과 과거에 합격한 조선 군대의 대장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1905년 을사늑약을 밀어붙이고는 조선 군대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이에 반발하고 반항한 조선 군대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로는 우리 할아버지는 의병대장이라 말 타고 칼을 휘두르며 일본 군인들과 싸웠는데, 단칼에 일본군인 목 다섯을 쳐서 떨어뜨리는 맹장이었다고 자랑하시곤 했습니다. “단칼에 어떻게 일본군인 목 다섯을 벨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입 밖에 내 놓고 질문하지 못하고 그냥 와아 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기관총을 쏴 대는 일본 침략군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할머니는 나라 잃은 백성, 의병대장의 부인으로 일본 밑에서 살아갈 이유도 없고 살아갈 길도 없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자신도 자결했습니다. 그러나 두 살배기 갓난아이, 우리 아버지는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서 살려 두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된 우리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이 거두어서 저 평안북도 두메산골에 있는 고모를 찾아 맡겨 주었습니다.
우리 아기 아버지는 고모 슬하에서 준수한 소년으로 자라 산골짜기에서 염소치기가 되었습니다. 어엿한 소년 염소치기가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쪽 복음이라고 하는 성경 책, 가령, 마태복음만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고 나누어 주면서 전도를 하는 판서원이라고 하는 전도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주머니가 주는 성경책으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소개하는 강계 고을에 있는 미국 선교사 감부열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는 영실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천애 고아 우리 아버지는 교장선생님댁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양 신학교에 진학합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시골 마을에 개척교회 전도사 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한국에서 쫓겨나다시피 만주로 떠났던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
만주에서 한국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 가야 하는데 만주의 우리 동네에는 한국 중학교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유학 보내기도 형편이 안 되고 해서, 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공장지대에 와 있는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 세운 일본 중학교에 진학하게 했습니다. 항일 운동하시는 아버지가 왜 저더러 일본 중학교에 가라고 하시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하시는 말씀 “너는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 해. 너 성경책에서 모세 이야기 읽었지? 모세가 원수의 나라 애급 궁전에서 자라면서 애급 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해서, 애급 말도 배우고 애급 정치도 배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자가 됐지 않아? 너는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 해.”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한국 학생이 들어가기에 어려운 일본 중학교에 합격을 했던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무더운 여름 방학인데도 우리 중학생들은 산에 올라가 구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8월 7일엔가 소련 군대가 만주로 쳐 내려온다고 탱크를 몰고 내려오다가 우리가 판 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도 그 무더위에 땀을 흘리며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12시 5분 전에 일본인 담임선생이 학생들을 불러 모아 차려 자세를 시키고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경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2시 시보가 울리자, 일천황의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목이 쉰 것 같은 늙은이 목소리로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했고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일본 학생들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눈물을 닦으면서, “이제 집에 가서 짐을 싸 들고 고향 땅 일본으로 돌아가자. 사요나라…….”하며 소리 내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은커녕,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 것 같은 공포심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선생님의 사요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걸음아 날 살려라, 헐레벌떡 산언덕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며, “대한독립 만세.”소리 지르며 저를 환영했습니다. 어머니와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를 얼싸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몇 번이고 소리 질렀습니다.
분단 된 북한 땅으로
우리는 급하게 짐을 싸서 메고 이고 손에 들고 하면서 한국으로 오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양에 도착하자 기차에서 모두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우리 고향 땅 강계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차를 그대로 타고 있으면, 서울로 아니면 부산이나 목포로 그냥 타고 갈 수 있는데 내리라는 것입니다. 강계로 가서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백두산이 보이는 시골 동네에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강계 중학교에 편입학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는 동안에 한반도가 38선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에는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남에는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평양에 김일성이라고 하는 공산당 장군이 들어 와서 공산주의 나라를 세운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공산당 경찰들이 아버지를 보안서라는 경찰서에 끌고 가서 반공 설교를 하면서, 이제 미국이 우리분단된 조선을 통일 시킬 것이라는 설교를 그만하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일 목사 아버지는 졸지에 반공 목사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설교하실 때 만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우리 한국 민족을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제 무신론 공산주의 독재로부터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큰 소리로 자신 있게 설교하셨습니다. 공산당 보안서 경찰은 거의 매 주일 목사 아버지를 데려다가 협박을 하고 야단을 치면서 우리 목사 아버지를 친미 반공 목사로 찍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땅을 뺏기고 야반도주해서 월남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 아버지를 찾아와 어서 짐 싸 들고 야반도주해서 북한을 빠져나가라고 강권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어떻게 어린 양과 같은 교인들을 이런 공산당 독재 치하에 버리고 가느냐 못 간다, 우겼습니다. 결국 강권에 못 이겨 우리 식구는 야심한 밤에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우선 평양에 가서 있다가 기회가 되는대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월남한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평양,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시작하자 공산당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목사 아버지의 반공 설교는 유명해졌습니다. 김일성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는 강양욱 목사가 기독교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고 목사들이 공산당 김일성 정권에 복종하고 협조하는 친공 교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불려가서 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공산 당국의 미움과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6.25 발발
1950년 6월 25일은 2017년 올해처럼, 일요일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날 우리 목사 아버지의 설교는 정말 신나는 설교였습니다. 김일성이 뭘 모르고 전쟁을 시작해서 38선 넘어 남쪽으로 진군한다고 소리 지르지만, 이제 곧 국군과 미군이 반격해서 쫓겨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단된 조국이 한 나라로 통일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대략 그런 설교였습니다. 교인들과 나는 너무도 신나서 이제 곧 통일이 될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은 인민군이 승승장구, 괴뢰 이승만 군대를 밀어붙이고, 이제 곧 부산까지 밀고 내려간다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흉흉한 소문은 제가 다니던 평양신학교 교장 선생님과 다른 유명한 목사님들이 납치되거나 북한 군인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끌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 아버지는 내가 군대 갈 나이 19살이라고 교회 목사관 마루를 뜯고 그 밑에 땅을 파고, 나를 그 속에 밀어 넣고 숨어 있으라고 하고는 마루를 덮어 버렸습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흙구덩이 안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가, 밤늦게 기어 나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흙구덩이 안에 들어 가 자고…….그렇게 지냈습니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평양 시내를 폭격하고 공장지대와 군부대가 있는 데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목사 아버지는 교인들 심방 나갔다가, 보안서원들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셨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저의 동생들은 모두 시골에 있는 친척 집에 피난을 가고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저와 어머니만 목사관에 남아 있었습니다.
“너는 환자야!”
8월이 되었습니다. 그해 평양은 너무 더웠습니다. 우리 집 마루 밑 땅 구멍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공습이 지나간 틈을 타서 맑은 공기라도 마시려고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동네 구석진 데 산책 나왔다가, 그만 보안서원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기다리고 있던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저 말고도 숨어 있다가 붙들려 나온 동네 청년들이 트럭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 다리를 건너서 어느 고등학교로 끌려갔습니다. 신체검사장이라고 하는데 신체검사 할 청년들이 서 있는 줄이 꽤 길었습니다.
내 차례가 돼서 헌병의 안내로 군의관이 있는 작은 방에 들어섰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50대로 보이는 군의관이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너 어디 아프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아닙니다. 아픈 데 없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대답을 해 놓고는 후회했습니다. ‘아니, 아프다고 해야, 신체검사에 떨어져서 군대 안 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 군의관은 더 큰 소리로 “넌 기관지염으로, 군대 갈 수 없어. 여기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써 줄 테니, 어서 여기를 나가 집으로 가.”하면서 불합격증에 뭔가 쓰고 큰 도장을 꽝 꽝 하고 찍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누군데, 우리 교회에 나오는 의사 선생님인가 생각해 봐도 난생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들고 그 방을 다시 나왔습니다.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길고 긴 줄을 따라 반대쪽으로 걸어 나오는 데, 누가 뒤에서 “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다보니 저의 바로 밑 동생입니다. 17살 겨우 된 남동생이 나를 보고 “형 어디로 가는 거야?”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보여 주면서, 집으로 간다는 말을 힘없이 했습니다. 동생은 내 두 손을 잡고 맥없이 “그래 형은 군대 가면 안 되지, 내가 대신 갔다 올게…….” 우리 형제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올해까지 67년 동안 우리는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대동강을 건너 평양 남쪽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오면서 “왜 그 난생처음 보는 면색 없는 북한의 군의관이 나를 살려 주었을까?”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이건 하나님이 날 살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나를 살려 주셨을까? 뭐 하라고?” 이 질문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평생의 질문이었습니다. 어떻든 여러분, 저는 그렇게 살아남아서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1950년 9월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
나는 마루 밑에 숨어 있으면서도 전쟁 소식은 모두 다 듣고 있었습니다. 늦은 9월의 어느 날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서울로 진격해서 서울을 탈환했다는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0월 초에는 UN 군과 국군이 평양에 입성했다는 기쁜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평양 시민들은 엉성하게 그린 태극기와 그리기 어려운 미국 성조기를 손수 그린 깃발을 들고나와서 군인들이 평양에 들어오는 것을 소리 높이 환영했습니다. 815 해방되던 날보다 더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곧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평양 정부 청사 광장에 나타나서 평양 해방을 선포하고 통일이 다 된 것처럼 환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목사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평양 대동강 남쪽 산언덕에서부터 시작해서 강가와 경찰서 감옥을 찾아다니며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기진맥진하고 있던 차에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 아버지를 대동강 강가에서 시체로 찾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다른 네 분의 목사님들과 한 밧줄로 묶여서 총살당한 체 누워있었습니다. 아버지 시체를 부둥켜안고 인민군 따발총 총알이 박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 이 원수를 어떻게 같아야 합니까?” 하면서.
아버지를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뒷산 언덕에 묻어 드리고, 우리는 중공군이 치고 내려온다는 소식과 함께 후퇴하는 미군과 국군들을 따라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나는 부산에서 대한민국 해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해군 소년 통신병으로 훈련을 받고, 얼마 있다가 미국 해군에서 훈련을 받을 기회를 얻어 1953년 미국 해군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미 해군 친구의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 초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다시 배우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당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뛰어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적 인권 운동이 어떤 것인지 신학생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나치에 저항해서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했다가 붙들려 감옥에서 쓴 옥중서한들을 읽으면서, 우리 목사 아버지의 순교정신, 항일저항운동, 그리고 공산 독재에 대한 저항, 그것이 신앙운동만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의 신앙과 행동을 곰곰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의 의미, 실제 행동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운동, 반독재 운동
반공 순교자 목사의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여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기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고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경험적인 반공주의자입니다. 공산 독재의 총탄에 순교하신 목사 아버지의 아들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한민국에서 인권을 무시하고 민주인사와 언론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학생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군사 독재 정치를 “반공”의 이름으로 찬성하고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을 하는 선배 목사님들과 한국 NCC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그리고 기독자 교수들과 함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유신 정권을 반대하는 민주화 인권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서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합동수사 본부에 잡혀가서 해직당하고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4년 동안 아주 작은 교회에서 목회 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학살한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것,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결국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최선의 반공은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허덕이고 배고프고 아프고 서러운 한 맺힌 암흑의 삶을 살아야 하는 동포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신군부 아래서 광주 민중항쟁의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이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평화와 통일을 이룩해야겠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북에서나 남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하기는 힘들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감시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협의회는 남북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선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84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움으로 남과 북의 교회 지도자들이 일본에서 만나서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운동을 개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교회 지도자들과 남한 교회 지도자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앉아 세계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의 평화 통일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님의 성찬을 남북 교회지도자들이 함께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는 감격적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의 기쁨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하여 1988년 우리 NCC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이른바 88선언을 공표했습니다.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아들과의 만남
이렇게 우리 한국 교회 에큐메니컬 운동 지도자들은 5.18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기독교도연맹 지도자들과 제네바와 미국 등에서 끊임없이 접촉하고 모여 앉아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통일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 사람도 끼어 있었습니다. 1991년 가을, 제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에서 북한 그리스도교도 연맹 이른바 조그련 대표 목사님들과 세계교회협의회 여러 유럽과 미국 교회 지도자들, 평화운동가들과 만나는 모임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북한에서는 조그련의 총무격인 강영섭 목사가 다른 4명의 대표들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만사 제쳐 놓고 치과병원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강영섭 목사는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북한의 영양문제와 위생문제가 컸으면, 강영섭 목사의 치아가 엉망이 돼서 외국에 나오자마자 치과병원을 찾아갔으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강량욱 목사의 아들과 마주 앉아서 우리나라 평화와 통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감격과 기쁨보다는 마음속의 갈등과 혼란을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1950년 6 25 전쟁 통에 평양에서 순교자 아버지를 교회 뒷산에 묻고 대한민국으로 내려와 해군에 입대한 이 순교자의 아들이 아버지 원수의 아들과 마주 앉아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운명, 저의 고민과 번민은 옛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면서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순교자 아버지에게 호소했습니다. 밤새 기도했습니다. 순교자 아버지는 침묵했습니다. 내 기도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저의 가슴에 와 닿는 소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원수를 도와주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침 우리 대화 모임의 회의장으로 입장했습니다. 벌써 북한 그리스도교 연맹의 목사님들과 참석자들이 들어 와 앉아 있었고 미국과 유럽의 교회 대표들 그리고 캐나다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내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그 개회식에서 저는 남한 교회를 대표해서 주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자리를 찾아 좌정하자마자, 북조선 조그련 대표 목사인 강영섭 목사가 나를 보더니만,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저더러 자기가 하는 주제 강연을 조선말로 하는데 영어로 동시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순교자 목사 아버지 원수의 아들이 나더러 자기 연설을 통역해 달라니?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을까?” 화도 나고 불쌍하기도 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니 강 목사님, 통역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아니야…….” 손을 흔들면서 그 사람은 영어를 못 하고 자기를 감시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내가 영어를 제일 잘한다고 해서 부탁하는 거라고 머리를 숙여 가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건 이적행위다. 우리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에는 북한의 적을 이롭게 하고 도와주면 배신자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감옥에 가야 한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극단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잠깐, 우리 대표들과 의논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한국에서 온 대표 목사님들과 의논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우리 친구 대표들이 모두 돌아앉으면서 “그건 서 박사가 알아서 해야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날 새벽 나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내가 할 거다. 강영섭목사에게 다가가서 “하겠습니다. 원고를 주십시오.” 강 목사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아하면서 주제 강연을 하기 위해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동시통역하는 좁은 통 속으로 들어가 땀을 흘리면서 한마디 한마디 북한 교회와 북한 정부의 입장을 영어로 번역해 나갔습니다. 밖에 앉아 있는 강 목사를 감시하러 왔다는 북한 통역관은 내 통역을 검열하는지 강연 원고와 내 통역을 열심히 비교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동시통역 통 속에서 땀을 닦으며 나오는 저에게 강목사가 먼저 달려와 감사의 박수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대표 친구들이 몰려와 내 손을 잡으면서 강 목사 우리말 강연보다 영어 통역이 더 분명하고 명 통역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거 틀림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렸구나…….” 하면서도 나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강영섭 목사의 주제 강연은 북한 정권 선전이 전부였지만, 내가 원수가 부탁하는 일을 해냈다는 데 나 스스로 감격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우리 남한 교회의 평화 통일을 위한 염원을 담은 주제 강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영어 동시통역을 부탁한 우리 순교자 원수의 아들 강영섭 목사에게 한없는 사랑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강 목사는 원수라고 하는 남한의 순교자 목사 아들인 저에게 스스럼없이 통역이란 어려운 일을 부탁했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어색해하지도 않고, 내가 혹시 통역을 잘 못 하거나 왜곡하거나 의심하지도 않고 허심탄회하게 마음 문을 열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나를 믿고 통역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해방감을 실감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북한 동포들에 대해서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과 동정과 대화와 기도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의 조그련 대표 목사님들과 평신도를 만나서 대화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양 봉수교회에서의 만남
저의 평양 방문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10여 년 전, 제가 홍콩에서 아시아의 기독교 대학을 지원하는 미국 재단의 일을 보고 있는 동안, 평양에 시작하는 과학기술대학 건립을 지원하는 방문단에 끼어서 평양에 가게 되었습니다. 평양 과기대 총장으로 초대된 재미 교포 김진경 총장과 함께 봉수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봉수교회 앞마당에서 10여 년 전 제네바와 미국에서 만난 북한 조그련 여성 대표였던 김혜숙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혜숙 선생은 1986년 첫 번째 제네바와 글리온 남북 교회 대표자 회의에 통역으로 왔다가 거기서 남북교회 대표들이 세계교회 대표들과 함께 한 성찬식에서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어 평양으로 돌아 가 봉수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공산당원이며 북한 정부의 고급 관리였습니다. 제네바 회의가 끝나고 한국 식당에서 작별의 점심을 먹다가 이 양반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서 박사님, 저는 남조선의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영어 공부를 더 해서 정말 훌륭한 통역이 되고 싶어요. 저를 꼭 불러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작별한지 10년이 넘도록, 서로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2005년엔가 평양 봉수교회 앞뜰에 만난 것입니다. 자기는 1986년 글리온 남북 교회 지도자들과 나눈 성찬식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와 세례를 받고 성가대원이 되었고, 이제는 집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이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간 지 얼마 안 됐다고 가족 자랑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봉수교회 교인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라고 해서 앞에 서서 교인들을 둘러보았습니다. 300명 가까운 교인들이 줄을 정돈해서 앉은 것처럼, 정렬해 앉아 있었습니다. 모두들 얼굴이 까맣게 보이고 야윈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온 힘을 모아서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평양을 떠난 지 벌써 60년이 되어 옵니다. 대동강도 옛날 같이 흐르고 있고, 모란봉도 옛날과 다름없이 푸르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과 북은 아직도 갈라져 있습니…….” 저는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남조선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있는데, 앞에 앉은 교인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양을 방문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마지막 말로, “여러분 얼마 안 있어 다시 오겠습니다. 통일된 평양에 서울서 기차 타고 다시 오겠습니다. 살아생전에…….” 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러분, 분단된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살아생전에 평양 가는 기차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서 봉수교회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는 형제자매들을 얼싸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그 날, 그 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광선
1931년 4월 15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있다. 1978년 동 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83년 기독교학회장,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88선언’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등이 있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