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갈래 길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했나. 이 길 뿐이라고.”
40여년 전 학교 안에까지 형사들이 들어와 학생들을 감시하던 박정희 정권시절. 김민기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이, 어른, 장사꾼, 노동자, 사장님, 군인, 시인, 스님, 가수, 공무원, 운동선수, 거지...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이. 빨갱이, 자본가. 멍청이, 똑똑이. 이들은 저마다 제 길을 갑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빨갱이’는 물론이고 머리가 긴 것도, 치마가 짧은 것도, 게을러 빈둥거리는 것도 도무지 그 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가고, 죽고, 본인들은 물론 그 주변사람들까지 사회에서 매장되었습니다.
독재자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길만이 옳고, 모든 이들이 마땅히 그 길을 따라 걸어야한다는 확신에 차서 그리했을 겁니다. 결국 그는 술 마시다 부하에게 총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딸이 다시 아버지의 길을 흉내 내다 감옥에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이 길 뿐이 아니고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엊그제 대통령 인사를 평하는 한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황우석 사태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20조원 규모의 과학 기술 지원금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히고도 탕평인사라고 대통령이 자화자찬해서는 안 된다, 지지율이 7,80퍼센트를 유지한다고 자만하지 말고 지금이야말로 겸손하게 뒤돌아보아야 할 때다’ 대통령이 잘하기를 바라는 노파심에서 나온 지극히 지당한 충고이건만 많은 댓글들이 늙은이는 입 닥치라는 식으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노무현, 문재인은 무조건 옳다?
심히, 아주 많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럿이 같이 공부를 하는 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는 스님이 어느 날 불쑥 이러시는 거였습니다. “변호사님, 기독교는 죽은 사람 시체를 십자가에 높이 걸어두고 떠받드니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스님 그게 아니구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당신의 몸과 마음, 마지막 목숨까지 버리고 비워 이웃을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신 거랍니다. 나를 비우고 이웃을 섬기면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게 되어있고 그게 십자가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금강경에서 ‘나’라는 상(相)을 버리라 하셨듯이 나에 대한 집착을 각자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모범을 보이신 거랍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저 당신의 그 십자가를 믿으면 내 죄가 사해진다는 식의 무슨 기괴한 마술 주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십자가를 이런 마술 주문쯤으로 알아들으면 이건 스님 말씀마따나 시체 하나를 높이 걸어두고 떠받드는 이상한 짓거리에 다름 아닐겝니다.
어느 찬송가 대목처럼‘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가 아니라, 우리도 당신처럼 바로 그렇게 각자 제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입니다.
일찌기 석가세존께서도 ‘멸하여 사라지는 내가 아니라 법(法), 곧 나의 가르침을 귀의처 삼으라 ’고 마지막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웃을 향한 자기 봉헌이 아니라 ‘나를 영생으로 인도해줄 예수’라는 이름에만, 세존이 가르치신 무상(無常, 無相)의 법(法)이 아니라 ‘나를 극락왕생 시켜줄 절대자 석가모니 불’의 이름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제자들은 ‘석가세존’과 ‘예수’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길을 걷는 상대방을 향해 바보들이라고 비웃어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존이나 예수님 두 분 다, 이 개체 ‘나’에 대한 상(相), 집착을 버리고 자유로워지심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자비,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으니 두 분이 걸어가신 길은 짐짓 달라보여도 도달하신 데는 한 곳이어라.
우리 집 마당 풀밭에는 여치가 삽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창 밖 거미줄에 내가 애지중지하던 그 여치가 걸려들었습니다. 얼마간 발버둥 치더니 거미에 진액이 빨려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거미의 길, 여치의 길.
세상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길, 불교의 길, 공자의 길, 노자의 길,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여러 갈래 길...
제 욕망을 좇아 죽어라 달려가는, 도둑놈의 길, 남을 어거지로 제 길로 끌고 가는 독재자의 길, 미치광이 트럼프의 길...
이 길, 저 길. 빨갱이의 길, 자본가의 길. 멍청이의 길, 똑똑이의 길. 바지런의 길, 게으름뱅이의 길..
그리하여 이 모든 길의 끝은 마침내는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의 품안에 이를 것입니다.
이 글은 <공동선> 9, 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