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강원도 홍천 도심리교회
» 도심리 골짜기 맨 끝자락에 있는 12평 도심리교회
홍동완 목사 꿈은 아프리카 선교
호주서 선교사끼리 갈등 보고 짐 싸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 것’ 약속하고
겨우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목사 내려놓고 허드렛일 도맡아
어르신들도 그저 “동완이”로 불러
그래도 뒷담화 이어지다 결국 칭찬
마을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반장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기적 일어나
마을제사에 기도하라더니 “아멘”
칠순 맞은 할아버지 첫 세례자 되고
주민 절반이 줄줄이 교회로
주일마다 한 집씩 돕는 섬김예배
곰취 심어 함께 가꾸고 수익 나눠
» 도심리 마을 반장인 홍동완 목사가 도심리교회에 나타나자 푸들이 안아달라고 달려든다
길 끝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강원도 홍천군 화천면 도심리교회다. 그 옛날 화전민들이 살던 곳에 자리 잡은 터다. 12평 교회가 고적한 산골에 별처럼 박혀 반짝인다. 이토록 앙징맞은 교회가 인적이 드문 산골에 있어 아쉽고, 이렇게 ‘자연스런’ 교회가 세속의 홍수에 휨쓸려가지않고 방주로 남아있어 다행이다.
홍천읍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심리 마을입구에서부터 교회로 올라가는 5킬로미터 가량 잘 단장된 길가에 개복숭아와 돌배가 심어져있다. 도심리 30가구 주민들이 공동으로 심어 3년 전부터 생과와 농축액으로 팔아 수익을 올리는 과실수다. 이 도심리반장이 홍동완 목사(54)다.
홍 목사는 애초 아프리카 선교를 꿈꿨다. 이를 위해 먼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4년간 선교훈련차 머물렀다. 그곳에서 선교사들은 하나 되기는 커녕 반목하고 갈등하고 비방했다. 옆교회에 망하든말든 오직 내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개교회주의가 치성한 교회들이 파송한 선교사들 역시 한국교회 이전투구의 압축판이었다. 같은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귀국후 선교단체에서 일하던 젊은이들과 2002년 이 산골로 들어왔다. 그런데 어디선가 공동체를 한다는 말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장애인시설을 한다는 걸로 알고는 아예 길을 막아 차량 통행까지 막았다. 홍 목사가 주민들을 찾아가 부탁하자 반상회가 열렸다. 반상회에 가자 주민들은 그에게 장애인시설과 기도원을 하지않을 것과 환경오염을 하지않는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이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말것을 약속하라고 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사가 됐는데 말도 말라니 “하나님 어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말’에 힘을 준 약속이었다. 그는 그순간 속으로 말했다고 했다.
“그래. ‘말’로 하지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삶과 행동으로 증명하겠습니다.”
» 도심리 밭에서 더덕을 캐는 주민들과 얘기를 나누는 홍반장 홍동완목사(오른쪽 두번째)
» 도심리에 귀촌한 김병렬 최회님 부부. 최씨는 자신도 서울에서 통장을 했지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분은 보다보다 처음본다고 했다. 김씨는 자기들은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목사님이 좋아 곧 도심리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했다.
결국은 정체 드러낼 것’ 의구심
그 때부터 마을의 막내인 그는 주로 노인들인 주민들의 해결사가 되었다. 힘이 필요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목사’라는 것을 내세우지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동완이’로 불렸다. 교회도 개척하지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구심은 쉽게 사그라지지않았다. 결국은 언제가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며 비방이 그치지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선행 뒤 어떤 의도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주민들을 인위적으로 교묘하게 전도할 생각을 하지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그 마음으로 남이 보는데서나 보이지않은데서나 한결 같이 일했다. 부인 이은림씨(53)는 “마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안보는 처럼 행동했지만 나중에 보니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주민들끼리 모여 ‘길 가운데 있던 돌 누가 치웠지?’라고 물으면 다른 주민이 ‘누가 치우긴 누가 치워 동완이 아니면 치울 사람 있어’라는 대화들이 오가며 비방이 어느 순간 칭찬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주민들은 마을총회를 열어 만장일치 박수로 그를 도심리 반장으로 뽑았다. 그 때부터 호칭도 ‘동완이’에서 ‘홍반장’으로 바뀌었다.
그는 더 바빠졌다. 자식들이 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아 생계를 잇기 어려운 할머니를 위해 치료의사들을 만나 장애등급을 받고, 백방으로 뛰어다녀 기초생활수급을 받게 해 할머니의 그늘진 얼굴에 미소를 찾아준 것도 홍반장이었다. 비만 오면 새는 집을 위해 군청에서 컨테이너를 얻어다가 설치해준 것도 그였다. 도심리 주민들은 다 자연수를 이용하는데 모터펌프가 고장날 것에 대비해 아예 사비로 장비와 부품을 사놓고 일분대기조처럼 달려나가 해결해주는 것도 그였다.
그러던 어느해 정월 대보름날 거리에 돼지머리와 시루떡과 북어와 과일들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에 주민들이 그를 불러세웠다. 그에게 대표기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해와 달과 별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로 기도를 시작했다. 적막한 산골에 그의 기도가 울려퍼졌다. 그의 집 이외 주민 가운데 크리스찬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아멘”하고 화답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 마을 사람들과 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홍반장. 토박이인 노부부는 지금까지 교회에 나가본적이 없지만 자기들도 홍목사한테 감화를 받아 곧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했다.
» 할아버지는 비닐하우스를 찾아온 홍목사에게 비닐하우스 환기를 위해 비닐을 올려달라고 마치 자기집 일꾼인양 부탁했고, 홍 목사는 자기 집 일인양 익숙하게 그 일을 해주었다.
“교회의 빛과 소금 되라 한 것 아니다”
마을 주민의 칠순잔치에 갔을 때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주인공 할아버지가 그에게 “우리 마을에서도 낮엔 일하고 밤엔 기도하고 찬송하는 교회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술김에 한 말이려거니 했는데 그가 정말 이 마을 첫번째 세례자가 되었다. 그렇게 8년전 교회가 시작되었다.
4년 전엔 그가 처음 왔을 때 예수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당시 반장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신자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이 처음 홍반장을 예수쟁이라고 얼마나 비방하고 다녔는데…”라며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크리스찬 한명 없던 마을에서 이제 주민 45명 가운데 절반이 교회에 나온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도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예배 때는 모두 교회에 모인다. 추수감사절 때는 수확물을 모두 제단에 올리고 함께 감사예배를 올린다.
도심리교회는 독특한게 많다. 십일조가 없다. 또한 주일날에도 예배는 오전에 한번만 드리고 오후가 되면 지역섬김예배로 대체한다. 교회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 한집씩을 골라 농사일과 허드렛일을 집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홍 목사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지, 교회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한게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그것이 사람들을 교회에 묶어놓기보다는 자신이 주민들을 위해 교회를 나서는 이유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교회를 개척한게 아니라 12명의 제자들과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믿음만을 강조하기보다는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교회 위 밭 1천평에 곰취를 심어 함께 주민들과 가꾸고 있다. 곰취 판매대금은 함께 나눈다.
이렇듯 나누니 도심리엔 신자와 비신자, 토박이와 귀촌자간의 갈등이나 반목은 남얘기다. 얼마전엔 화촌면 마을만들기 경진대회에서 18개리중 1위를 차지해 어르신들은 “다 도심리에 복덩어리가 굴러들어와서”라고 말한다.
» 텔레비전도 없이 사는 홍동완 목사 부부는 매일 밤 7시30분부터 한시간반동안 마을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기쁜 시간으로 여긴다
» 5킬로미터 정도 골짜기가 들어가는 도심리
“도심리에 굴러들어온 복덩이”
귀촌자인 최회님씨(61)는 “나도 서울에서 통장을 해봤지만, 반장이라고 이렇게까지 주민들을 알뜰 살뜰하게 보살펴주는 분은 보다 보다 처음”이라고 했다. 남편 김병렬씨(65)는 “우리도 곧 교회에 나갈 것”이라고 귀띰했다.
언젠가 마을 어르신이 “성직자는 원래 그렇게 화를 안내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도 속이 쌔까맣게 탄 적이 많아요”라고 답했다. 여전히 016을 쓰는 홍 목사의 낡은 투지폰엔 ‘절대 불노(화를 안냄)’란 글이 써있다. 그에겐 삶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수도장이다.
처음올때 초등학교 1,3학년이던 두 딸도 성인이 돼 서울로 가고 이제 부부만 남은 산골에서 그들은 텔레비전도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은 저녁을 물린뒤 7시반부터 한시간 반동안 둘이서 교회에 앉아 세상사람들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란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려면 물고기가 많은 큰곳에 갈 것이지 왜 이 산골에서 이러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도라는 이름의 탐욕마저 내려놓고 ‘작은 불씨’ 하나 심는 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긴다. 또한 이곳이 그 무엇보다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의 큰교회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인격적 교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정 수가 넘으면 관리가 되어버려. 대기업식 고객관리나 다름없게 되어버려서 뜬구름공동체가 되어버린다며 그러면 사람이 많고 프로그램과 시설과 서비스가 좋아도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건강한 몸은 서로 연결돼 있어야 해요. 연결되면 얼마나 행복한 지 몰라요. 그렇게 인격적 교제가 일어나야 행복해져요. 그렇게 마을 주민들과 자연과 늘 함께 친하게 사는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창조세계인데 왜 행복하지않겠어요.”
홍천/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