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지라 서울시내 도로가 휑하다. 덕분에 약속시간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유시간만큼 잠실 석촌호수 둘레길을 걸었다. 어르신은 건강때문에 젊은이는 다이어트를 위해 걷는다. 필자는 시간이 남아 걷는다. 같이 걷고 있지만 걷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태극기 세대’는 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치이야기를 나누고 맞은 편 놀이공원에는 기계음과 함께 자지러지는 소리가 합해지면서 또다른 조화음을 만들어 낸다. 왁자지껄한 경상도 사투리 한 팀이 지나가더니 이내 젊은 새댁과 어린 딸이 눈을 맞추며 일본말로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걸어간다. 뒷모습은 한국의 여느 모녀와 다를 바 없다. 심심찮게 서양인도 걷고 있고 게다가 승복까지 끼어들었다. 두 대의 유모차가 지나가는데 한 대는 아이가 타고 한 대는 비었다. 반려견이 같이 걷고 있는 것을 보니 ‘개 유모차’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호수가의 새로운 길거리 문화로 진화 중이다.
본래 호수가 아니였다. 한강 본류인 송파강과 지류인 신천강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었다. 지류는 본류가 되고 본류는 지류가 된 것이다. 이내 지류에는 퇴적물이 쌓이면서 물흐름이 더 느려졌고 1970년대 일부 인위적 매립을 거친 후 호수로 바뀌었다. 강남시대가 열리며 대로가 뚫였고 호수 가운데로 다리가 생기면서 호수마저 동서로 나뉘었다. 물에는 유유히 오리배가 다니고 교각 위로는 줄지은 차들의 행렬이 바쁘게 지나간다. 이런저런 주변 풍광에 취해 있는데 호주머니 안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약속시간인데 어디냐?”고 묻는다. 이런! 너무 멀리 와버렸군. 땀나게 반대편을 향해 급히 걸었다.
본업을 마친 뒤 다시 잰걸음으로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찾았다. 500여년 전 당시 청나라 황제공덕비는 비석의 규모도 만만찮고 돌의 품질도 최고급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거북받침은 두 개다. 한 개는 홈만 파여있을 뿐 등짝은 비어 있다. 황제비석을 올리기에 너무 작다고 퇴짜를 맞은 증거물이라고 구전은 전한다. 하지만 몇백년의 세월이 흐르니 주변의 빌딩숲에 가려 “큰 강가에 우뚝한 돌비석을 세우니(有石巍然大江之頭)”라는 비문의 마지막 구절이 무색할 만큼 왜소해졌다. 비석보다 백배이상 높은 길 건너편의 123타워에 대한 수식어로 더 어울리는 문장이 되었다.
삼전도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패전기록이다. 승자가 알아서 기록하면 될 일을 굳이 패자의 손을 빌어 기록하게 했다. 침략자의 대륙적 배포와 관대함 그리고 은혜를 찬탄하는 것이 기본골격이다. 문장가들은 두고두고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 보다 잠시 비겁한 게 낫다는 계산아래 서로 손사레를 쳤다. 현존 비문도 지은이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 임금의 분부를 받자와’ 할 수 없이 쓴 비자발적 글이라는 상투적 형식을 빌어 면피하고자 했다. 명필 역시 이 글씨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붓을 잡지 않았다고 야사는 전한다. 약소국의 힘없는 석수장이와 문인 그리고 명필의 침묵시위가 알게 모르게 서려있는 셈이다.
비석 역시 뒷날 땅에 묻히기도 하고 한강물에 던져지고 혹은 스프레이로 화풀이를 당했지만 용케도 큰 훼손없이 오늘까지 건재하다. 우여곡절 끝에 고증을 거쳐 이 자리를 차지했고 철골기둥과 캐노피 지붕까지 덧씌워진 국가문화재가 되었다. 조선도 청(淸)도 이미 없어진 나라이며 ‘굴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심리적 여유도 한 몫 했으리라. 한문 만주어 몽골어로 동시 기록된 글로벌 비석이지만 한글이 없는 관계로(가끔 사극이나 소설로 환기되긴 하지만) 우리에겐 이미 잊혀진 과거사가 되었다. 석촌호수가 예전에는 한강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