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선 교수가 아버지 이신 목사가 그린 그림을 들어보이고 있다
뛰어난 화가이자 신학자이자 목사였지만 한국 교회의 주류로부터 철저히 소외를 자처한 삶을 택한 이신(1927~81)의 초현실주의(슐리얼리즘)을 조망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종교개혁 500돌을 맞아 탐욕과 맘몬이 신을 대신하는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영감을 주는 이신의 삶을 탐구하려는 신학자들의 공부모임을 통해 탄생했다. 이신박사의 딸인 이은선(세종대· 전여신학자협의회장)교수와 남편 이정배 전감신대 교수·목사(전기독자교수협의회장)가 강원도 횡성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자택에서 여는 현장아카데미의 공부모임엔 김성리(인제대) 교수, 박일준(감신대) 교수, 손원영 한국영성예술협회 예술목회연구원장, 신익상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은록 미술비평가 및 기획가, 이경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 등이 함께 했다.
» 이신 화가 목사전남 여수돌산에서 태어난 이신은 일제 때 명문인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던 은행에 취직했지만, 결혼까지 한 몸으로 상경해 감신대에 입학해 새 삶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직전 신학대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이신은 6·25가 터지자 고향인 전라도로 돌아가 활동하며 ‘한국 그리스도교 교회 환원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한국 교회의 고질병이던 모든 교파의 분열을 거두고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가 외국 선교사의 입김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교회로서 일치하자는 성령 운동이었다. 그는 주류 교단을 두고, 소수파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고난의 삶을 선택했다. 서울과 충청도 일대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이신은 40살이라는 늦깎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서울 명륜동 산동네에 두고 온 아내와 4남매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하는 고달픈 유학생활을 하며 미국 남부의 명문 밴더빌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71년 귀국했다.
미국 출신 박사가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그의 출셋길은 보장됐다고 여겼다. 그는 영어와 일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능통한 지성이었지만, 소수파였기에 산동네 목회를 계속 해야 했다. 그는 산동네에서 정신지체아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평생 ‘한국적 그리스도교회’를 꿈꿨던 이신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억압과 침략으로 늘 깨달음 없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한민족이 신앙마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우리가 성서를 읽고 깨달은 대로 성서가 우리들의 역사와 삶에 가르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오직 ‘밥’만이 추구됐던 60년대 미국 유학도로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믿음은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갖기 이전부터 이미 믿음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대상이 되었던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믿을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주어진 자유로 인해 자유로운 존재다.
-스위스의 사상가 막스 피카르트의 글
다음은 딸인 이은선 교수의 글이다.
» 이신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책 아버지 이신은 이 믿음으로 해방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을 택했고, 6‘25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를 잃고 가족이 흩어지는 경험 속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갔으며, 그 교회에서도 외국 선교사들과 성서 해석과 성령 이해의 차이로 그나마 안정된 자리를 떠나야 했다.
40대의 늦은 나이에 어린 자식들과 부인을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일, 돌아와서도 여전히 안정과 안위 대신에 산동네 무허가촌의 궁핍한 삶에 머물렀고, 나중에는 그 거쳐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산골로 내겨가신 일, 이런 모든 것들이 그의 믿음의 열매들이었다고 할수 있다.
그는 당시 미국 유학까지 한 박사였지만 주변에는 항상 가난한 민중과 학벌이 높지 않은 변방의 목회자들뿐이었다. 심지어는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지만 병원에 가는 대신 기도원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의 한 좁고 허름한 방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은(天恩)”을 말하며 가족들에게 잘 지낼 것을 당부하고 기쁜 모습으로 가셨다. 어디에서 그런 믿음의 지속하는 힘이 나왔으며, 어디에 근거해서 그는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읽고 쓰고 선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그만두지않으면서 또 동료들을 모아 세상의 달라짐과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그의 믿음이 단순한 그의 의지가 아니고 주어진 것이고, 그 믿음이 ‘신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비록 오늘날의 우리들은 이 기원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앞서 주어진 것에 대한 의식을 잘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자아의 주관으로 돌리고, 그래서 신도, 전통과 권위도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하나의 기적처럼 보인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인간 삶을 어쩔 수 없이 ‘조건 지어진 존재’로 보지만 그 삶의 활동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행위’라고 하면서 그 행위는 ‘결과의 예측불가능성’과 ‘과정의 환원불가능성’ 그리고 ‘작자의 익명성’이라는 불행한 요소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를 가득 채우는 ‘기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이신의 딸 이은선 (세종대)교수
<환상과 저항의 신학-이신의 슐리얼리즘 연구>(김성리·박일준·손원영·신익상·심은록·이경·이은선·이정배·정혁연 함께 씀, 현장아카데미 편, 동연 펴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