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메로>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엘살바도르 로메로대주교의 ‘절친’이 방한했다. 로메로가 1980년 3월 24일 미사 도중 군부독재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4명의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망한 산살바도르교구의 지도자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추기경(75)이다. 사춘기 때 로메로대주교를 만나 사망할 때까지 군사독재에 함께 항거한 그는 로메로의 일기장에 38번이나 언급돼 있을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로메로를 ‘나의 친구’라고 표현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지난 4일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연 ‘2017한반도평화나눔포럼-정의와 평화 한반도의 길’에 남미의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7일 서울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 만났다.
그는 “엘살바도로에선 로메로가 최초의 복자(성인으로 시성되기 전단계)인데, 한국은 수많은 순교성인이 난 땅”이라며 먼저 ‘순교자의 나라’에 온 감격을 표했다. 차베스 추기경은 로메로가 암살 당하기 전에 ‘저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는 암살자를 용서합니다. 저를 죽인다면 저는 엘살바도르인들 속에서 부활하겠습니다’고 한말을 다시 언급하면서 주교로 임명될 당시 한 피정에서도, 암살 당한날 강론에서도 로메로가 ‘겨자씨’ 비유를 든데서 그가 ‘순교’를 택한 사실을 전했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자신의 삶만을 챙기면 생명을 잃겠지만 겨자씨가 땅속에서 죽는다면 새싹이 되고 열매가 된다’고 했듯이 로메로도 ‘조그만 겨자 씨앗’이 되길 자처했다는 것이다.
올해 엘살바도르 사상 첫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엘살바도르의 12년 내전을 종식하는 데 결정적 중재자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 후에도 1984~1989년 5차례에 걸쳐 진행된 군부 정권과 반군 사이의 협상을 끌어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양측은 1992년 결국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그는 유일하게 5번의 협상테이블에 모두 참석해 평화협정의 모든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산증인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차베스 추기경에게 한반도 문제의 중재 역할을 맡겼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가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에게 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때여서 이 보도는 더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외신과 관련해 “저처럼 연약한 추기경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고 웃으며 공식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경험을 세심하게 소개했다.
“우리는 중재에 앞서 먼저 3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첫째 그리스도적 평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둘째 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셋째 어떻게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이냐’였다. 이를 어떻게 실현할지 주교좌성당에서 강론 때마다 가르쳤다. 첫째를 위해선 인내와 대화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둘째는 군부독재에 의해 짓밟히고 있어서 반군과 중재에 앞서 인권을 되찾기 위해 예언자적 선포가 필요했다. 그 선언은 사막에 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점차 첫째 둘째 여건이 나아져 막상 중재를 하려했을 때 반군과 한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헌법 위반이었다.”
» 엘살바도르 내전으로 희생된 엘살바도르 국민들(위)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아래)
» 빈민의 벗이었던 생전의 로메로대주교
» 영화 <로메로>에서 총을 둔 군인들의 위협에 맞서고 있는 로메로 대주교
그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때 당시 대주교가 ‘법이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에 인간에게 봉사해야한다‘며 헌법 개정을 이끌어내 협상에 나서도록 했음을 회고했다. 그런데도 평화는 여전히 산 넘어 산이었다고 한다.
“군부와 반군만 있는게 아니었다. 그들과 미국과 러시아 그 한가운데 엘살바도로 국민들이 있었다. 무기는 외국에서 들여왔지만 그 무기로 인해 죽는 사람은 결국 엘살바도르 국민이었다”
그는 “이번에 판문점을 방문해서도 그런 똑같은 상황을 목도했다”며 “여기서도 전쟁이 나면 죽는 사람은 한국인들이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않으려면 어떻게든 남과 북이 대화의 자리를 마련해야하고, 평화를 향한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만들어가는 것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곳 성당에서 전례를 하며 한국장인들이 한땀 한땀 수놓은 화려한 제의를 받아입었다. 그런 옷도 장인의 영감과 노력, 창의력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살기 위한 평화를 만드는데 얼마만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한국인들은 무엇이든 너무 ‘빨리 빨리’만 하려든다.”
차베스 추기경은 “너무 서두르지말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대로 우선 멈추는 것을 배워 침묵을 내면화하고, 하느님을 향해 내면을 열고 묵상한 뒤 활동에 나서야 한다”며 “먼저 내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뒤 행위에 나서라”고 권했다.
그는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취임 직후 멕시코와 국경에 장벽을 설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는 벽이 아니라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말을 들려주며, 그런 다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순교한 로메로 주교의 선배 순교자들이 많은 한국인들이 그런 순교 정신을 따른다면 멋진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