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하지 않고 도중에 내던지는 것을 `포기한다'고 말한다. 일본어로는 '아키라메루'다. 너무나 한심하면서도 안타깝고 허무함이 느껴지는 말이라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은 단어 중 하나다.
그러나 일본에서 '포기한다'와 '밝힌다'의 어원은 같다. 무릇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밝히면 '포기할 수 있다'는 의식이 보다 강하게 작용한다. 가령 나이 들고 싶지 않다고 아무리 바랄지라도 '태어난 이상 나이가 드는 것'이 '명확'하므로 '노인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 밝히다'는 전제는 잊힌 채 단순히 단념하고 버리는 것을 '포기한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말은 늘 변화한다. 어떤 일이든 '명확하게'밝히면 조금도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을텐데 사람들이 '명확하게 밝힌다'는 전제를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된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면 깨끗하고 산뜻하게 포기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밝혀야 좋을까?
제일 좋은 방법은 사물이나 자기 마음의 본질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예컨대 비가 오는 바람에 예정된 행사가 중지되었다고 하자. 그때 행사에 가는 것을 포기하려면 '날씨는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하필 비가 오는 거야", "기껏 준비했는데"라며 끊임없이 불평하게 된다.
또는 내 경험상 다이어트를 포기할 때는 "나는 먹기 위해 살아, 지금은 식욕이 앞서", "흔히 남자는 죽지 않으려고 살을 빼지만 여자는 죽어도 좋다며 살을 뺀다고 말하지. 이제 나에게는 몸보다 마음의 다이어트가 더 중요해"라는 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밝혀두면 자기혐오에도 빠지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 '근성이 없다'고 비난받아도 당당하다.
사물의 본질을 잘 관찰해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사물의 본질이 명확해질 때까지 철저하게 몸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좌절할 때까지, 녹초가 될 때까지 해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하려면 철저하게 좋아하는 수밖에 없다. 몸이 부서져라 좋아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포기가 가능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점이 명확해지면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패한 일을 포기하려면 해보는 데까지 해보라. 실패했을 때야말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명확히 밝힐 기회다. "거기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 그러니 실패했지, 하는 수 없다"라고 포기하고 다음 행동으로 넘어가면 된다. '명확하게'밝히는 작업을 꾸준히 하면 "당연해, 어쩔 수 없어"하고 포기하는 상황이 와도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험담을 들어도 "그 사람은 험담하면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그러니 나를 나쁘게 말하는 것도 당연해"하고 납득한다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는다.
옳은 말을 하는데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는 "이해할 능력이 없으니 알 리가 있나"라고 생각해도 좋다.(하지만 이 방법은 상대를 무시해야 하니 추천하지는 않는다.) 또는 "다른 더 좋은 의견이 있을까 봐 상황을 지켜보는 모양이네. 당연히 지금 내 의견만 채택할 수는 없겠누나"라고 깨달으면 그 순간부터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좌절해 의욕을 잃으면 일어설 수 없다. 일어나려면 좌절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는 공정이 필요하다. "하는 수 없지"라며 포기하고 일어설 때마다 "이건 이런 거였구나"하고 한 가지 본질이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