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나는 교회보다 폼나는 삶, 문화 르네상스 ‘신바람’
변방의 북소리 <8> 충남 보령 시온교회
» 충남 보령시 천북면 시골에 문화 르네상스를 꽃피운 시온교회 김영진 목사
20년 마을 벗 자처하는 김영진 목사
평범한 시골 왁자지껄하게 바꿔
거금 들여 빔프로젝트 구입해
예배당 극장 열어 영화 틀어주고
뒤이어 노래방 기계도 들여놔
먼저 마이크 잡고 한 곡조 뽑아
폐교 위기 초등교 오케스트라 만들고
할머니들 커피 가르쳐 바리스타로
소박한 꽃잔치로 시작한 축제
머드축제와 함께 보령의 ‘명물’
날마다 한 시간 이상 농사 공부해
쌀 서울 직판하고 배추절임 사업도
기타 치고 연극인 꿈이던 청년
충남 보령시 천북면은 농지와 야산 사이사이로 농가들이 있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마을이다. 이곳 역시 젊은이들이 떠나고 주민의 대다수가 노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농촌과 다를 것이 없는 ‘별 볼일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곳에도 ‘별 볼일들’이 많아졌다. 폐교 위기에 처한 낙동초등학교 어린이 26명 전원은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고, 어부들과 할머니들이 커피를 배워 바리스타가 되고, 아름다운 수목원에선 아무런 상업적 판매 없이 먹거리를 퍼주는 축제가 열린다. 이 희한한 시골을 보러 수도권에서 마을여행을 오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시골에선 감히 꿈꾸기 어려웠을법한 것들을 꿈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김영진(57) 목사를 만나러 갔다. 장항선 광천읍에서 차로 10여분을 가면 천북면 신죽리에 있는 시온교회가 있다. 교회가 멋들어지게 지어진 것도 아니고, 십자가 첨탑이 높이 서 위용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튀지않고’ 소박해 들꽃같은 인상이다. 1993년 김 목사가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않아 시골마을 40여명의 교우들이 무너지기 직전인 교회를 새로 짓자고 했다. 그래서 김 목사가 직접 설계를 해서 이처럼 소박한 교회를 지었다. 그랬더니 교우들이 “이왕 짓는거 빚을 내서라도 다른 교회들처럼 폼나게 지을 것이지, ‘농협창고’ 짓느냐”고 항변했다. 그 때 그는 “교회를 폼나게 짓는다고 교회가 되는게 아니고, 모이는 우리가 교회처럼 사는게 중요하다”고 교우들을 설득했다.
» 소박하게 지은 시온교회
허름한 농가들이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않을만큼 돈을 들이지 않고 교회를 지은 그가 교회 신축 뒤 거금 550만원을 들여 가장 먼저 구입한 게 빔프로젝트였다. 그리고는 예배당 강단에 광목천으로 200인치 스크린을 만들어 극장으로 만들어 즐길거리 없는 시골분들에게 재미 있는 영화들을 보여줬다. 예배당극장엔 교우들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또 시골사람들에게 기독교영화를 보여주자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안있어 노래방 기계를 구입했다. ‘예배당에서 이래도 되나’며 쭈뼛쭈뼛하는 이들 앞에서 김 목사가 먼저 노래 한곡조 뽑아 분위기를 누그러뜨리자 앞다투어 마이크를 잡았다.
이 시골의 문화 르네상스는 이렇게 시골 노인분들에게 맞는 눈높이에서 시작됐다. 축제도 마찬가지였다. 신죽리수목원에서 매년 11월이면 열려 머드축제와 함께 보령만의 축제로 떠오른 온새미로축제도 시온교회에서 소박한 꽃잔치로 시작됐다. 꽃을 보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니, 자기집에 키우는 화분들을 한데 모아놓고 구경 해보자는 것이었다. 농사일에 바쁜 시골사람들이 혹여 ‘무슨 꽃구경이냐’고 핀잔을 줄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자기가 키운 꽃들이 남들이 보아주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것을 의외로 좋아했다.
‘생김새 그래도’ 혹은 ‘언제나 변함없이’란 순 우리말 ‘온새미로’처럼 김 목사는 20여년간 주민들 곁을 한결같이 지키며 지역을 변화시켰다. 그가 최근 ‘자랑스런 충남인’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그는 충남이 아니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자랐다. 더구나 성장 과정에서 도시를 벗어나본적이 없는 도시남이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농사의 농자도 몰랐다. 대학때까지 그룹사운드에서 기타를 치고, 연극인이 되기를 꿈꾸던 그였다. 그래서 그가 전형적인 농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농촌’을 꿈꿀 수 있었는지 모른다.
» 배추절임 작업을 위해 배추를 옮기고 있는 김영진 목사
그렇다고 그가 지금도 농촌에 대한 ‘날탕’인 것은 아니다. 그는 농삿일을 못했지만, 운전실력으로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트럭으로 서울에 싣고가 직판하기도 했다. 또 배추산지인 이곳에서 배추절임 사업을 해보자고 설득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표절임 판매처로 자리매김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 목사는 또 매주 ‘이주의 농사정보’를 교회주보에 실었다. 1990년대 천리안과 하이텔의 농사동호회에 가입해 매일 한시간씩 뒤져서 정리한 정보였다. 지금도 그는 매일 한시간 이상 농사에 대해 공부하는 ‘농사수도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교회 밖에선 예수의 예 자도 안 꺼내
그는 지금까지 교회 밖에 나가 교회와 예수에 대해 애기해 본 적이 없다. 돼지 농가에 갈 때는 돼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한우농가에 갈 때는 한우에 대해 공부하고 가 그들과 같은 논높이로 대화하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들려주려고 애썼다. 교회에서 꽃화분들을 가져다놓고 온새미로축제를 열 때도 농부들이 좋아하는 막걸리와 안주가 빠지지않도록 했다. 마을이고 지역이고 무슨 일을 하든 그를 먼저 찾아온데는 그가 ‘목사’로서가 아니라 노인들을 거드는 ‘마을 청년’이자 ‘벗’으로 살아온 때문이다.
인근 낙동초등학교가 학생수 부족으로 교육청에 의해 폐교 대상학교로 지정되자 학부모들이 찾아온 이도 김 목사였다. 김 목사는 방과후학교 지원마저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 운영하던 방과후공부방을 그대로 낙동초교로 옮겼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는 방과후에 피아노를 가르쳤고, 교회에서 운영하던 영어교실, 한문교실도 열었다. 입학생이 2명 밖에 안되자 그는 바닷가마을 학성리까지 찾아가 아이들을 유치하고는 자기가 등학교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스쿨버스 운전기사가 된 김 목사는 무려 하루 64킬로미터를 돌며 학생들을 데려오고 바래다주는 기사를 11년째 해오고 있다. 동문회에서도 모교가 폐교 되지않게 재학생 전원에게 바이올린을 사주며 함께 했다. 이종철 동문회장은 김 목사도 이렇게 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스쿨버스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아픔도 있었다.
노인들도 덩달아 오케스트라
낙동초등학교 아이들은 한 방송사의 주선으로 비올리스트 용재오닐이 두달간 이곳에 상주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쳐 함께 연주하는 <천상의 수업>이 방송돼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선물했다. 지금도 낙동초등생 26명 전원은 합창단이면서 모두 몇개의 악기를 다루어 합주하는 오케스트라단원이다. 아이들은 천북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오케스트라단을 유지하고 있다. 시골 아이들의 악기 연주 바람은 어른들에게로 이어져 노인들이 바이올린과 클라리렛을 배워 오케스트라단을 만들어 이제 동요 정도는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광천읍에 나가서 노인 15명 오케스트라단이 공연을 시도한다.
악기와 함께 이곳에 부는 또 하나의 바람이 커피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 주민들에게 사진과 ‘커피’를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된 커피 바람은 보령의 자랑이 되고 있는 ‘말통 커피’ 사업으로 이어졌다. ‘말이 통하게 한다’는 뜻의 ‘말통커피’는 파주에서부터 서해안을 따라 12개의 체인점을 갖추고, 로스팅과 기계수리, 배달까지 모두 ‘목사티 안내는 목사들’이 해내는 사회적 기업이다. 학성리 어부들이 커피를 배워 축제 때마다 자기들 돈으로 커피를 제공한다. 이런 헌신은 지역의 업체들에도 전파돼 온새미로축제 등이 열리면 지역에서 축산농가는 돼지고기를 가져오고, 우유·치즈공장에선 유제품들을 가져와 무료로 풀어놓는다. 지난달 온새미로축제 때도 이렇게 무료로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을 1천여명이 찾아와 즐겼다.
지금은 할머니들이 커피를 배워 할머니 바리스타들 탄생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커피와 바다, 공룡섬 등을 묶어 힐링을 위한 보령과 천북으로의 ‘마을여행’을 서울의 지인들에게 소개하느라 김 목사는 신나 있다. 김 목사가 그렇게 신이 날 때마다 더욱 신이 나는 것은 지역민들이다. 시온교회 신자가 몇명이냐는 물음에 김 목사가 3300명(천북면민수)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 김목사가 요즘 수도권 지인들에게 소개하는 천북면 마을여행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