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이니 50년이 다 되가는 일이지만 저희 아버님의 그 한마디는 아직도 마음 깊이 살아있습니다. 아버지는 참 멋있는 분이셨어요.
친척 한 분이, 사귀고 있는 미군장교를 저희 부모님께 인사시키고 싶다고 놀러와도 되냐는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이혼한 것만해도 창피한데, 사귀는 양놈을 데리고 오겠다니 우리 집안에 ‘양갈보’라도 생겼냐고 흥분하셨지만, 아버지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오는 놈 막지 말고, 가는 놈 붙잡지 말라 했다’며, 어머니를 다독이시고 그 친척분의 방문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덕분에 오라비는 영어실력을 보일 수 있었고, 모든 친척들에게서 따돌림받던 그 친척분은 손위였던 우리 어머니에게서는 내쳐지지 않는 위로를 받게 되었지요.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누구나 다 받아들이신 건 아닙니다. 명절이면 쌀과 고기를 싸들고 찾아오는 부하 군인들이 있었는데, 그럴 땐 대문앞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너 이 새끼, 이런거 들고 올거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 하지만 뇌물이 횡행했던 그 시절의 아버지는 참 외로우셨지요. 승진심사가 있을 때 마다 약주잔에 대고 ‘사필귀정’이란 말을 되뇌이실 땐 참 처절해 보였습니다. 엄마, 사필귀정이 뭐에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을 때 제겐 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었지만, 승진이 늘 더뎠던 아버지는 누군가에겐 능력부족의 장교라 판단되었겠지요.
우리는 참 자주, 남의 사정을 모르면서 혼자 판단해버리고 심판해버리곤 합니다.
어머니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전신의 왼쪽마비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휠체어에 모시고 나가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까지, 왜 이리 되었냐고 하면서 혀까지 끌끌 차곤, 휙 지나갔습니다. 어머니는 그래서 밖에 나가길 꺼리셨지요 -‘이유를 알면 자기가 도와줄 일이나 있대? 아픈 남의 속 모르면 좀 가만히나 있지…’
얼마 전, 2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는데, 그다지 춥지 않은 데도 모자에 마스크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마스크 뒤의 말이 분명히 들리지않아서, “괜찮니? 감기가 든게로구나?” 하고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항암치료를 마친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이유를 말하면서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습니다. 순간 마음이 철렁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습니다. 혹시 제가, 오늘은 미세먼지 수치도 낮은데 뭘 마스크까지 끼고 그래? 라면서 야지를 놓았더라면요? 그래도 그 친구가 그렇게 담담히 얘기할 수 있었을까요.
횡단보도를 건너다 누군가와 부딪혀서, ‘당신 눈멀었어? 앞 좀 보고 다녀!’라고 소릴질렀는데, 그 사람은 정말 맹인이었더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우린 아이코! 하며 오히려 미안해하고 그 사람을 도와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확인할 수 없는 저마다의 마음 속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가요? 모릅니다. 우린 모릅니다. 모른다는 상태는 우릴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한 어떤 답이라도 빨리 만들어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진정 모른다는 자세로 나자신과 남을 대한다면 우리의 시각은 넓어지고, 서로를 덜 아프게하는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르면서 내린 판단으로 남을 아프게 한 일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고, 새해에는 좀 더 몰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