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받은 상처, 결국 사람으로 치유해야
40대 명퇴당한 현실이 힘들어 가끔 욱하는 당신에게
연말 모임에서 과도한 반응 보여
명퇴당한 처지에 공격까지 당하니
영혼에 가득한 독가스 빼는 일 시급
고독은 필요하지만 고립은 곤란
‘폭’(暴)의 단어가 춤추는 연말이 다가왔습니다. 회식이 잦아 음식을 ‘폭풍’ 흡입하거나 ‘폭식’하게 되고, ‘폭탄주’와 ‘폭음’으로 이어져 작은 논쟁이 자칫 ‘폭언’으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업종에서 1인기업으로 일하고 있는 40대 남성은 그런 자리의 희생자입니다.
“술이 화근이었어요. 저는 정치적 논쟁을 즐겨 하지 않는데, 옛 직장 선배가 제 고향 사람들을 하나의 정치적 색깔로 입혀 매도했습니다. 욱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런 선배를 ‘꼰대 같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이 문제였나 봅니다.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매우 소원해졌습니다.”
이 사태는 술 탓이기도 하지만 요즘 그의 심리적 상태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는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한 처지였습니다. 회사와 동료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던 차에 공격을 받으니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이죠. 프리랜서로 작은 사무실을 내고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거대 조직을 나와 ‘크리에이터’라는 멋진 명함을 선택했지만, 행운은 아직 그의 편이 아니었고 사무실 문을 닫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차에 이 일이 터진 것입니다. 대상을 모르는 분노가 함께 상승작용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모든 연말 모임을 사절하고 있다 합니다.
“모임에 나가면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눈에 거슬려요. 누구는 어떤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고 떠들고, 어떤 친구는 주식 투자 잘해서 몇 억 벌었다고 하는 얘기를 듣다 보면 갑자기 제 자신이 초라해져요. 똑같이 회비를 내고 참석한 모임에서 내가 왜 그런 자랑질을 듣고 있어야 해요? 왜 마시기 싫은 폭탄주까지 마셔야 해요? 이 나이에?”
그는 자기고용 시대의 희생자입니다. 회사의 정규직이 아닌 1인기업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미국에서는 ‘긱(Gig) 이코노미’라 합니다. 정규직 대신 프로젝트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직업이 많은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흐름과 유행을 말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이름과 달리 ‘긱 이코노미’는 자칫 생존 자체가 힘들어 숨도 못 쉬는 ‘끽 이코노미’로 전락할 우려도 있습니다. 말장난 같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미국보다 우리 사회는 시스템이나 인식이 아직 부족합니다. 어렵게 열린 그의 입은 거침없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어떤 사람들인지 아세요? 오래 다니던 회사 주변을 기웃거리는 일명 ‘예일대’ 족입니다. ‘회걱모’도 지긋지긋하고요.”
짐작하겠지만 그가 말하는 ‘예일대’란 미국 명문대학이 아닙니다. ‘예전 일터 주변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입니다. 퇴직 이후에 평생 몸담던 직장 주변에 공동 사무실을 내고 마치 출근하듯 나가 단골 식당에서 여전히 ‘회걱모’로 살고 있는 중년들의 현실을 빗댄 뼈아픈 농담이지요. ‘회걱모’란 ‘회사를 걱정하는 모임’의 준말입니다. 그만큼 갈 곳 없는 중년의 실직문제는 청년의 실업문제와 더불어 한국 사회를 위협하는 현실임에 틀림없지만, 그는 이런 문제마저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건드리면 누구라도 날카로운 가시로 찌를 것처럼 잔뜩 웅크린 고슴도치 같았습니다. 그는 평생직장으로 믿고 의지하던 곳에서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듯했습니다. 자신감을 잃었고, 자존감이 상했으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과도하게 사회화된 인간관계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소통의 문을 닫아걸고, 극단적으로 말해 사회적 자폐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됐습니다.
독립적으로 일하다 보면 조직에 속할 때보다 더 외롭고 더 불안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자기 자신의 정확한 좌표도 알기 어렵습니다. 춥고 쓸쓸한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불안합니다. 불안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길은 늘 먹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취업을 앞둔 졸업생, 결혼을 앞둔 커플, 퇴직을 바라보는 중년, 가진 것 별로 없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옵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첫째, 영혼에 가득한 ‘독가스’부터 빼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이전 회사를 향한 서운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독가스가 남아 있으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자신입니다.
둘째,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남의 허물만 보입니다.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유도 생기고 아량도 생기고 다른 이의 장점도 보입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세요!
셋째, 창조적 일을 하는 이들에게 홀로 있는 시간은 소중합니다. 남다른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혼자 있는 시간에 탄생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연계와 협력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독학고루’(獨學孤陋)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일하다 보면 편협과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는 뜻입니다. 아프리카의 오랜 속담은 언제나 의미 있습니다.
“당신이 빨리 가길 원한다면, 혼자 가세요. 당신이 멀리 가길 원한다면, 함께 가세요.”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치유 역시 사람이 합니다. 불안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곁에 소중한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 그리고 진정한 친구입니다. 고독은 필요하지만, 고립은 곤란합니다. 결국 사람이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