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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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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주례

2013.7.16 <당당뉴스> 지성수 목사

 

내세울 일은 결코 못되지만 나는 체력도 약하고 운동신경도 쇠약한 사람이지만 싸움꾼이다. 팔자가 사나워서 어려서부터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애'...가 아니라 '전투와 전투 속에 시달리는 고달픔'속에서 자라서 내적, 외적으로 싸움을 많이 해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세상과 싸우는 직업인 목사가 되어 한 평생을 싸우다가 이제 어느덧 상처뿐인 늙은 전사가 되었다. 비록 이제까지의 싸움에서 영광과 훈장은 없었지만 보람과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갈등이혼부부영화싸움.jpg 

*갈등 중인 부부의 모습. 영화 <싸움> 중에서

 

 

내가 참여한 싸움중에 가장 힘든 싸움은 이혼 싸움이었다. 다음(Daum)의 내 아이디가 ‘이혼주례’인데 그 이유는 실제로 결혼 중매를 하거나 주례를 서는 것보다 이혼에 관련되어 본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혼주례가 될 팔자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관여했던 이혼은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지만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우리 부모는  이혼이 오늘 같이 흔하지 않던 1940년대 말, 내가 6개월 때 생모와 헤어졌는데 아버지의 재혼으로 출생한 동생들이 내가 20살이 될 때까지도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 시절에는 호적등본 같은 것 없어도 학교 다니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동생들의 호적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20년간 만나지 않았던 아버지와 생모를 만나도록 주선을 해서 이혼서류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게 했었다.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 장면의 어색함이란 도저히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지켜본 이혼에는 지저분한 이혼, 화끈한 이혼, 칼부림 나는 이혼, 소송으로 지루하게 끌려가는 이혼 등등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심지어는 이혼을 위한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 나가서 양쪽 모두에게 공평한 증언을 했다가 자기편을 안들어준다고 양쪽으로부터 공동의 적으로 몰려 버린 일도 있었다.

 

호주로 온 이후에는 이민사회의 특수한 성격에 따라 이혼 업무(?)가 더 다양해져서 호주 가정법에 따른 이혼 절차도 익히게 되어 이제 명실공히 동서양의 이혼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혼주례 업무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이혼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잘 안 되도록(?) 거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다 정말로 잘 안되면 다행한 일이지만 잘 되어(?) 이혼을 하게 되면 “너 죽고 나 죽자”를 “너 살고 나 살자”며 웃으면서 헤어지도록 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게의 경우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로 끝나지 않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리다”로 끝난다.

 

그래서 실제로 이혼식은 아직 한 번도 실행에 옮겨보지는 못했지만, 이혼 예식은 결혼식에서의 ‘신랑 신부 키스’ 대신 ‘따귀 한 차례씩’으로 했으면 어떨까 한다. 그런가 하면 헤어지면서 소중한 약속을 하는 정말로 쿨한 이혼도 보았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린 자녀에게 회복할 수없는 상처를 준 것만 해도 미안한 일이니 피차에 재혼을 하더라도 다시 애를 낳아 형제관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고 서로들 "아랫도리 단속 단디(단단히의 경상도 발음) 하기로"다짐하면서 헤어지는 커플이다. 전혀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부모가 다양한 결혼 생활을 해서 우리 형제의 성씨가 3가지이고 2종류의 이복동생이 있는 나에게는 절실히 강조하고 싶은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 주례와 달리 이혼주례는 생기는 것도 없이 완전히 사람의 진을 빼는 일이다. 결혼 주례는 당사자들이 잘해야 한두 번만 만나면 되지만 이혼주례는 시도 때도 없이 수없이 만나야 하고 비상상황도 대처해야 한다. 때로는 자다가도 뛰어 나가야 하고 밥 먹다가도 달려 나가야 할 때가 있다. 마치 119 구급차 처럼. 이혼은 당사자들도 힘이 들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민폐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일단 싸움이 심해지면 조용히 끝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이혼에는 ‘잘못한 편’과 ‘잘한 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잘못한 편’과 ‘덜 잘못한 편’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 이혼 주례는 ‘덜 잘못한 편’에 서서 ‘더 잘못한 사람’과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그 가정이 진정으로 내가 사랑하는 가정일 때, 자녀가 이혼을 하여 부모들이 느낄만한 마음의 고통만은 못하겠지만 정말로 힘이 든다. 그럴 때 나는, 이혼 주례를 할 능력이 없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당당뉴스(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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