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남의 나쁜 점만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는 남편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렇게 하는 남편을 나무랐지만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루는 그 부부가 어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양쪽 귀가 없이 기형아로 태어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그 아이의 귀에 대해 이야기할까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래서 그 집에 가기 전에 남편에게 약속을 받았다.
반드시 그 집 아이의 귀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 집에 가서 화기 애매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귀 없는 아들이 들어왔다.
아내는 그 순간 긴장했다.
혹시 남편이 아이의 귀에 대해 이야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아이에 대해 그 집 부부에게 말했다.
“흠…흠… 아이가 참 건강하게 보이는군요.“
그 집 아내가 아이를 보며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아무 일 없이 잘 크고 있어요.“
한참 아이를 보던 남편이 다시 한 마디 했다.
”아이의 시력은 괜찮습니까?“
그 집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두 눈 모두 1.2 1.2 인데요.”
아내는 남편이 귀가 아닌 눈에 대해 이야기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남편이 말이 갑자기 꼬였다.
“참 다행한 일이군요.
하나님도 참 고마우신 분이시지 어떻게 안경을
걸칠 곳이 없는 줄 알고 시력을 좋게 하셨을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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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나 이런 사람 꼭 있습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듭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 들기 때문입니다.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쉰이 되니 바뀌어야 할 것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사람은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자신이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