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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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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웃음꽃 부부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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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김명현-.jpg» 민영진 목사와 김명현 사모 부부


50년을 한결같이 하하호호 끊임없이 웃으며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 자기들만 웃는게 아니다. 남들도 웃기는 부부다. 마술 같은 부부의 유머와 해학에 빠지면 누구도 헤어나오기 어렵다. 끊임없이 웃음바이러스를 퍼트리는 행복 발전소가 바로 민영진(78)목사와 부인 김명현(74) 전 감리교여성지도록개발원장이다. 민 목사는 감신대 교수와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지낸 성서학자다. 그는 지난 2007년말 은퇴한 뒤에도 몽골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어 소수민족의 성경 번역을 돕는 세계성서공회 컨설턴트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대전침례신학교와 연세대 등에서 구약을 강의했다. 부인 김씨는 한국여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와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원장을 지냈다.

 그들이 결혼 50돌을 맞아 나란히 책을 출간했다. 김명현씨는 <지구별에서 노닐다>는 ‘김명현 이야기’를, 민 목사는 <미안하다, 별들아!>란 ‘민영진 시집’을 냈다. 두 권다 오랫동안 부부를 자식처럼 따르는 꽃자리 출판사 대표 한종호 목사가 펴냈다. 

 

1-.jpg 김 전원장은 <지구별에서 노닐다>에서 70여년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 글을 읽다보면 웃음 바이러스에 중독되지않을 도리가 없다. 특히 민목사를 점잖은 인격자로 여겼던 지인들은 그의 부인으로부터 전해듣는 그의 유머에서 그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더욱 놀란다. 부부가 주고 받는 대화록은 어떤 개그도 능가한다. 이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대화가 글을 쓰다보면 억지로 꾸며낸 가공품이 아니라, 이들에겐 늘 일상의 언어라는 것을 안다. 가령 식사자리가 무르익으면 민 전원장이 “건망증이랑 치매랑 어떤게 다른지 아느냐?”고 동석자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그는 “건망증은 아, 숟가락 어디에 두었지?하는 거고, 치매는 아예 용도를 모르는 거에요”라며 “요즘 이이(민 목사)가 치매에요. 내 용도를 통 몰라”라고 한다. 그러면 모두가 박장대소를 한다. <지구별…>이 소개한 ‘노는 남자’ 민목사와 ‘노는 여자’ 김전원장의 대화록이 이렇다.

 

 하루는 신세계백화점 옆 회현동 지하상가를 지나가게 되었다. 워낙 옷을 좋아하는 나는 예쁜 옷들이 즐비한 상점을 그냥 못 지나가고 구경을 하면서 “어머 이것 예쁘다, 저것 예쁘다”고 군침을 삼키고 있는데 그이가 나를 막 끌고가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안 입는 것이 제일 예뻐.”

 

 그이는 가끔은 이 닦는 것을 잊고 그냥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가 있다. 그때 난 “여보! 이!. 만약 내가 새 여자라면 당신 이 안닦고 내 옆으로 올 수 있어?” 그이는 억지로 이를 닦고 와서 하는 말 “아유, 새 여자하고 자기 힘드네, 새 여자하고 자다간 내 이빨 다 닳아 버리겠는걸.” 그러고 며칠이 지났다. 또 이를 안 닦고 잠자리에 들려고 한다. 나는 또 “여보, 이!” 그이는 또 억지로 이를 닦고 오더니 “며칠 잔 여자도 새 여잔가!”

 

 그이가 해외출장을 한 보름 다녀오게 되었다. 오는 날 나는 너무 기뻐서 환영하는 마음으로 꽃을 한아름 꽂아 마루에 놓아 두었다. 그러나 그는 꽃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할수 없이 내가 거금을 들여 당신을 환영하는 꽃을 두었는데, 당신은 어쩜 그렇게도 무감각하냐고 투정을 부렸다. 그이는 미안했던지 나를 지긋이 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 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꽃 볼 시간이 있느냐”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보통 때는 안경을 안 쓸 정도로 눈이 좋다. 멀리 있는 것을 특히 잘 본다. 그이는 아주 눈이 나쁘다. 또한 나는 길눈이 밝은데 그이는 길눈이 어둡다. 하루는 그이가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좌회전 우회전하며 입으로 운전을 했다. 내가 좌회전하라고 했는데 그것을 놓쳐서 멀리 돌 수밖에 없었다. 약속시간은 급하게 다가오고 은근히 신경질이 나서 “아이 바보, 아이 바보”하며 놀렸더니 그이 하는 말 “나는 눈 좋은 당신이 고른 사람이고, 당신은 눈 나쁜 내가 고른 사람인 것을 잊지 말라고.”

 

 밤에 잠자려고 할 때 그이는 그냥 잔다. 하루는 내가 “여보 뽀하고 자야지!” 그러자 마지못해 볼에 살짝 뽀를 한다. 그다움 날 또 그냥 자려고 한다. 난 또 “여보! 뽀!” 그이 하는 말 “여보 난 한번 뽀하면 2~3일 효력이 있는데 당신은 겨우 하루밖에 효력이 없어?”

 

 하지만 그 긴 삶이 어찌 유머러스하기만 할 수 있었을까. 부부의 웃음 속엔 깊은 아픔도 녹아있다. 아니 <지구별…>에서 그의 아픔들을 듣노라면, 그런 아픔 속에서 길어낸 샘물 같은 웃음들이 더욱 달게 느껴진다.

 1970년대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로 유학간 남편과 함께 좁은 반지하방에서 두아들과 함께 살 때였다. 큰아들이 놀이터에서 그네에 부짖혀 눈가가 찢어지는 사고가 났다. 그런데도 김전원장은 아무 문이라도 두드려 도움을 청하고, 다섯살 배기 어린 것을 들쳐업고 약국이나 병원이라도 찾았어야하는데 바보처럼 아무 것도 못해줘 상처를 남긴 것을 아직도 아파한다. 그보다 더한 아픔도 있었다. 한달 생활비 겨우 100달러로 4가족이 생활하면서도 한국에서 온 성지순례객들을 대접하기 위해 그는 만삭의 몸으로 찬거리를 사러 값이 싼 재래시장으로 멀리 장보러 가곤했다. 그러다 너무 배가 아파오는데도 장 본 것들을 버리지못하고 겨우 들고왔다가 해산기가 있어서 병원에서 예정일을 석달이나 남겨두고 셋째아들을 분만했다. 그 아이는 겨우 15시간 세상에 머물다가 떠나고 말았다. ‘민영진시집’ 제목이 <미안하다, 별들아!>인 것이 그 셋째아이와 무관치않아 보인다. 아니나다를까. 이 시집에서 ‘추모’로 예루살렘 사울언덕에 묻었던 자식을 추모한다.

 

 수의랄 것까진 아니어도

 헝겊 한쪽이라도

 널 내손으로 감싸주었어야 했는데

 숨 거둔 네 몸에 향을 넣어주진 못했어도

 널 말갛게 씻어 새 옷 입혀 보냈어야 했는데

 비록 아비 어미 이역만리 나그네 길이었어도

 한 조각 땅이라도 구해

 거기에 널 잠재웠어야 했는데

 인큐베이터 안에서 숨을 거둔 널

 행려병사자로 분류한

 예루살렘 시청 위생과의 그 배려만도 고마워

 엉겁결에 작별의 몸짓도 못하고

 어린 널 영안실 직원 손에 맡겨

 낯선 이들 사이에 널 눕히고 말았구나

 강산이 한 번 바뀌고 나서 와보니

 이젠 흔적마저 없는 너

 여기 기브앗 샤울 공동묘지

 흙 속에, 바람 속에, 물속에, 열기 속에서

 너는 원소로 분해되고

 짧은 시간 속에서 맺은 인연만

 속세의 인연으로 남은 이 기억

 널 따라 망각의 세계에 묻힐 때나 끊어지려나

 아직도 너는 성장을 멈춘 채

 왔던 그대로 우리에게 머물러 있구나

 이 아빠의 마음이 아무리 비통해도

 평생 입 다문 네 엄의 마음에야 어찌 비하겠냐만

 예루살렘시청위생과 청서 벗어나

 마하네예후다 북적이는 재래시장 한 복판

 거기 서 있는 유래도 모를 검은 대리석 기념비 하나

 우리를 위로하는 조문객이려니 그것 붙잡고

 심장에 화살 맞은 짐승처럼

 중인환시리에 대성통곡한 것 말고는

 내가 네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2-.jpg아픔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와서는 유치원생 둘째아들이 임파선암에 걸렸다. 더구나 암이 임파선을 따라 너무 퍼져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약물치료를 하는 아이는 약을 먹기만 하면 매스껍고 울렁거려 자주 토했다. 약을 먹고나면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어린 것이 막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섭게 울었다. 그렇게 6년 동안이나 약물치료를 했다. 김 전원장은 너무도 절실하게 하나님께 매달렸다. 길거리를 갈 때조차 그냥 가지않고 두 손을 꽉 쥐고 기도하며 다닐 정도였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에서 예수가 아기를 데려갔다가 다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환상대로 둘째 한식씨는 목사가 되어 지금 루마니아한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큰아들 경식씨는 언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들은 그런 고난을 거치면서 아이들이 공부 잘하라고 윽박지르기는커녕 오직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을 고마워했다고 한다. 


 아들이 어느날 방과후 부모 몰래 오락실에 갔다가 가방까지 잃어버린 채 잔득 긴장해 돌아온 것을 보고선 민 목사는 “살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안아줬다. 10살이던 6·25 때 부산으로 피난 가서는 미 군부대 취사장에서 수채구멍으로 흘러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배를 채운 적이 적지않았다는 민 목사는 그런 고난 속에서 고난에 침몰 당하기는 커녕 밝고 환한 유머와 해학으로 타인들까지 어둠에서 건져낸다.

 부인 김전원장도 이에 못지않다. 둘째 아들이 대학생 때 시위에 나다닐때 “공부하느라 바쁜 너보다 시간 많은 내가 나가는 게 낫다. ‘민주엄마’ 나갈께”라고 하고, 도로에서 시위하느라 밤늦게 돌아온 아들에게 밥상을 잘 차려주며 “장한 내아들”이라고 포옹해준 엄마였다. 부모들로부터 ‘시위에 나가면 등록금도 안주겠다’고 으름장을 듣던 동료들은 급기야 ‘이상한 엄마’를 구경하겠다며 집에 까지 찾아왔고, 그 때 함께 온 여학생중 한명이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지금도 두 아들보다 며느리들과 더 친한 시어머니가 된 것만으로 희한한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이들 부부의 원앙 같은 금실이 그저 얻어진 것만은 아니다. 민목사의 <부부>라는 시에서 금실지락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엿볼 수 있다.

 

 내가 깨어있을 때는

 당신은 잠자고 있고

 내가 춥다고 창문 닫으면

 당신은 덥다고 창문 열고

 이렇게 매사에 서로 안 맞는 것 보면

 우리는 천생연분

 모자이크가 되어 조화를 이루는 

 부부가 맞나보네

 

 서로 다른 것들끼리 짝이 맞아야

 그 조화 아름답다는데

 해로 백년에 

 후손도 

 색깔 달리

 모양도 달리 남겨

 모자이크를 넓혀가야 하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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