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너나없이,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서울 성산동 소행주 사람들
»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입주자모임에서 얘기중인 소행주 사람들
한 지붕 여러 가족 공유주택 소통으로 마음 다리 놓고 나눠
누구나 님자 없이 닉네임으로 부르고 아이들에겐 모두 삼촌이나 이모다
아빠끼리, 엄마끼리, 어른끼리 여행 여자끼리 속풀이 한밤 한 잔 수다
급할 땐 서로 아이 맡기고 외출 아빠들도 칼퇴근해 회사 뒷담화
공동밥상으로 저녁해방 모임도, 은퇴 뒤도 귀촌해서 같이 살 터 마련
아이들도 대를 이어 공동생활 꿈, 함께 하니 불안감 덜고 욕심 줄어
» 설날 어른들에게 한꺼번에 세배를 올리는 소행주 아이들. 사진 소행주 제공
» 구정때 설빔을 갖춰입고 함께 한 소행주1호 9가구 식구들. 사진 소행주 제공
핵가족화와 1인가구화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집이 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소행주 1호다.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이란 뜻의 소행주는 2011년 3월 1호 9가구가 입주한 이래 지금까지 성미산 일대 4호를 비롯 10호까지 세워졌다. 소행주는 한 건물에 살지만 각자 독립된 주거공간이 있고, 공동부엌과 커뮤니티룸 등 일부분만 함께 쓰는 ‘코하우징’(공유주택)이다.
소행주 사람들은 한 건물에 함께 사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주말엔 아빠들끼리 2박3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아빠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건 아니다. 추석과 구정 후엔 엄마들끼리만 가는 엄마여행이 있고, 여름휴가철엔 모든 소행주 가족들이 다 함께 가는 여행도 있다. 처음 엄마들만 여행을 갈 때는 “우리만 남겨두면 어쩌라고?”라며 투정을 부렸던 아빠와 아이들은 이제 엄마들의 등을 떠민다.
엄마로부터 해방돼 자기들끼리 밥도 해먹고, 놀아보니 더 재미있더라는 것이다. 소행주에선 커뮤니티룸에 모두 모여 자주 놀지만, 이렇게 아빠들끼리만, 엄마들끼리만 여행을 가는 재미는 ‘안 가보면 모른다’고 한다. 이런 ‘끼리 끼리’ 여행이 진화되더니 이젠 아이들만 남겨놓고, 남녀어른들끼리 여행도 가기로 했다. 이제 서너명의 아이들이 대학까지 졸업해 아빠 엄마들이 모두 집을 비워도 동생들을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최근 주말에 포항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올라간 소행주 아빠들. 사진 소행주 제공
뭔지 모르고 왔지만 이젠 못 떠나
소행주에선 격의 없는 소통을 위해 누구나 닉네임을 부른다. ‘님’자 없이 ‘에이미’, ‘피터’ 식으로 편하게 부르다 보니 격의가 없다. 아이들에게 자기 부모를 뺀 나머지는 모두 삼촌, 이모다. ‘피터’로 불리는 윤상석(41)씨는 “코하우징이 뭔지도 모르고 아내가 가자니 따라 들어왔다가 이웃들과 형제 자매들보다 더 가깝게 의지하며 즐겁게 살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좋은 것은 외동이어서 외롭게 자랐을 딸에게 오빠 언니 친구 동생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 하는 삶’을 처음 생각했던 것도 아이들 때문이었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독박육아에 힘들어하던 엄마들도 소행주에 입주해서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옆집과 위아래 집으로 마실을 다니고, 급할 때는 아이를 맡기고 외출할 수 있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였다. 아빠들도 집에 오는 것이 즐거워졌다. ‘평범이’ 한희철(48)씨는 “아빠들끼리 친해지고 나니 회사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해 스트레스를 푼다”고 했다. 엄마들도 누군가 고민이 있으면 카톡이나 밴드에 공지를 띄운다 그러면 남편 아이들 다 자는 시간 여자들끼리만 살짝 공동부엌에 내려와 한잔을 하면서 얘기한다. 속풀이 집단상담에 다름 아니다. ‘느리’ 김우(48)씨는 “가까이에서 지켜봐주며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힘을 얻는다”고 했다.
소행주 식구들은 ‘저해모’라는 ‘저녁해방모임’을 만들었다. ‘저해모’는 집마다 따로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기 위해 2층 공유공간을 활용해 공동밥상을 시도했다. 소행주 엄마들이 식단을 짜서 장을 봐놓으면 주방 아주머니가 오후 3~6시까지 와서 밥과 요리를 해놓고 간다. 그러면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렇게 함께 하니 인건비와 부식비를 합쳐 4가족이라도 한 달 20만원 정도면 된다.
» 소행주 엄마들끼리만 술자리. 사진 소행주 제공
개인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보호
그러나 이것도 강제로 하는 건 아니다. ‘따로’ 또 ‘같이’ 가 소행주가 추구하는 것이다. 저녁밥상도 요리하는 것을 즐겨하는 가정이나 아이들이 많이 커서 육아에서 해방돼 식사 한 끼 정도 해먹는 게 큰 부담이 안되는 집은 직접 자기 집에서 따로 해먹는다. 저녁에 한잔하자는 공지가 떠도 오늘은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다면 이를 다 존중하고 방해하지 않는다. 개인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보호해주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주당들의 모임도 따로 있다. ‘박짱’과 ‘에이미’와 ‘느리’와 ‘봄봄’은 11년째 달마다 하루씩 술모임을 갖고 속내를 이야기한다. ‘박짱’ 박흥섭(57)씨는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불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며 “이웃들과 행복하게 지내면서 어린 시절에 켜켜이 쌓였던 외로움이나 그리움으로 인한 상처가 씻겨진 것 같다”고 했다.
소행주 사람들은 함께 살다보면 불안감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한다. 더구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신들이 현재 행복하지 않아서 늘 행복은 먼 미래를 상정하고 얼마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거나 어떤 대학에, 어느 직장에 들어가고, 어느 정도의 집이나 차를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은 행복을 현재 누리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특히 함께 살면서도 쓸데없는 데 욕심을 내지 않게 되어서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해 들볶지 않게 됐다고 한다.
» 따로 또 같이. 4명이서 11년째 매달 한번씩 갖는 유쾌한 술모임
20가구 집 지어 세컨드하우스로
그래서일까. 청년세대들에게 요즘 결혼과 출산 포기가 확산 추세지만 소행주에선 다르다. ‘박짱’과 ‘에이미’의 아들 민수(27)씨는 “서로 힘이 되어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컸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아이를 낳아 함께 기르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평범이’와 ‘느리’의 딸 한울(14)이도 “소행주에 들어오기 전 아파트에선 엘리베이터를 타며 이웃과 어색하게 인사하는 정도였는데 소행주에선 부모님이 외출해도 언제든 옆 집으로 놀러갈 수 있다”며 “나중에 아이에게도 이웃과 친구가 많은 이곳에서 살게 하고 싶다”고 했다.
어른들도 함께 어울려 살다보니 세상사람들이 하나 같이 이야기하는 노후 불안 같은 게 거의 없다고 한다.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 외롭지 않고, 큰 돈이 없이도 잘 살아낼 것 같은 자신감이 있다. 이미 ‘박짱’과 ‘밤비’ 등 공동육아 때부터 함께 했던 이들은 강원도 평창에 귀촌할 터를 마련해 20여가구가 집을 지어 세컨드하우스로 이용하며 귀촌을 준비하고 있다. 나머지 식구들도 “우리 늙어서도 헤어지지 말고 서로 의지하며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자”며 직장 은퇴할 시점에 시골에 함께 내려가 사는 꿈을 구체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