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아래 동네에 농사 짓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신심이 돈독하고 성품이 대나무처럼 곧으신 분이다. 절에서는 노보살님이라고 부른다. 그 노보살님은 매우 부지런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화통하다. 그런데 노보살님은 때로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이유인즉 누구라도 상식에 어긋나면 쏜살의 속도와 강도로 직설을 날리기 때문이다. “지금 뭐하는 것이요. 왜 경우 없는 짓거리를 허요?” 승속, 나이, 지위, 친소 불문하고 노보살님의 ‘도덕검’에 나름 천하의 고수들도 단 일합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나는 이 분을 뵐 때마다 다산 선생의 도덕률을 떠올린다. 선생은 초기 강진 유배 시절 자신의 처소를 사의재라고 이름 지었다. 생각, 얼굴 태도, 말, 몸가짐을 늘 살피라는 뜻이다. 경우 바른 사람이란 이 네 가지를 일상에서 단정하게 행하는 사람이다.
또 단정한 몸가짐이 믿음과 감동을 주는 사례가 있다. 사리불 존자는 석가모니의 상수제자이다. 그는 처음에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어느날 사리불은 거리에서 길을 걷고 있는 한 수행자를 만난다. 당시 갠지스강을 끼고 있는 바라나시는 다양한 종교수행가들이 저마다 일파를 이루고 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옥돌 같은 수행자도 많았지만 상식과 교양이 없고 거드름을 피우는 잡돌도 있었다. 그 때 사리불이 본 수행자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겸손하고 온화하고 걸음걸이는 매우 단정했다. 사리불은 매우 궁금했다. 저 수행자의 스승은 누구일까? 저렇게 품격있는 사람이라면 필시 가르침도 훌륭하겠지. 그 수행자의 이름은 앗사지 비구이다. 사리불은 앗사지에게 묻는다. “당신의 얼굴과 걸음걸이는 여느 수행자와 다릅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스승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답한 앗사지 비구는 그가 들은 가르침을 이렇게 전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 또 그 원인과 조건이 소멸하면 존재도 소멸한다” 사리불은 이 한구절의 말씀에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어둠의 세계가 확 뚫리는 울림을 받는다. 그는 곧바로 불교교단에 귀의한다. 십대제자 중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로 불렸다.
사리불이 큰 깨달음을 얻은 계기는 부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앗사지 비구의 단아하고 품격있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았다면 그와 부처님의 만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명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 듣기에도 보기에도 민망한 언행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물컵을 던지고 욕설을 내뱉는다. 돈의 힘을 믿고 사람이 사람에게 표정과 말로 폭력을 행사한다. 또 화면에서는 어떠한가. 글은 곧 말이고 말은 평소의 생각과 감정인데, 거짓과 모멸을 담은 영상과 댓글이 넘친다. 자신의 품격을 스스로 천박하게 만들고 있다. 이웃에게는 허물이고 자신에게는 자멸이다. “귀족이라고 해서 그가 고귀한 사람이 아니다. 천민이라고 해서 그가 천박한 사람이 아니다. 고귀한 행동을 하면 그는 고귀한 사람이고 천박한 행위를 하면 그가 천박한 사람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언과 행의 엄중함을 물었다. 우리 노보살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많이 배우면 뭐한당가? 사람이 경우없는 짓을 하면 안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