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승자와 패자, 당신의 서랍은 몇 개인가요?
우리의 삶은 오디션의 연속입니다. 오디션이라고 하면 신인 가수가 되기 위해 심사위원 앞에서 벌이는 예능프로그램을 떠올리지만, 직장생활만큼 더 치열한 오디션도 없습니다. 입사 시험, 투자 심사, 인사 발령은 그 결과가 발표되는 날입니다. 승자의 환호 뒤에는 패자의 뜨거운 눈물이 있습니다.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넘기며 어렵게 말을 꺼내던 40대 남자도 그 가운데 한명입니다.
“얼마 전 승진 인사에서 탈락했습니다. 입사 동기들 가운데 여러명, 심지어 후배 가운데 일부도 승진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데, 제 이름만은 쏙 빠져 있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감정을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창피했어요. 주변에서는 위로해준다고 하지만 패배자처럼 비칠까 술자리도 가기 싫습니다. 하루하루 가시방석 같습니다. 회사의 성장이 곧 저의 성장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우주가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회사생활 잘하는 것뿐이었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막막합니다.”
탈락은 분명 위기입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술잔을 들이켜도 절대 취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패배는 쓰라리겠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승진 여부가 결정되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공정하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던 40대 남자에게는 큰 아픔입니다. 직장인 10명 가운데 8명이 우울증을 하소연한다는 통계가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경쟁은 정말로 심각합니다.
누구나 위기를 맞습니다. 위기는 그 단어가 내포하듯 위험과 기회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지만, 길게 보면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실연, 가난, 실패를 가리켜 ‘인생 최고의 스승 3명’이라고 서양에서는 말합니다. 살다 보면 원치 않지만 쓰라린 패배와 어려운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때 나를 지켜주는 것은 무얼까요? 다시 일어나게 해주는 동력을 어디에서 찾을까요?
우선 실패 또는 패배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색하고 두렵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실패노트를 쓰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떻게 이 고비를 풀어가야 할까?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신비한 묘약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일본 야구선수 다르빗슈 유의 처지가 떠오르는군요. 다르빗슈는 올해 엘에이(LA)다저스가 우승이란 염원을 안고 지난해 시즌 후반에 야심차게 영입한 투수였습니다. 엄청난 기대와 달리 월드시리즈에서 2경기 모두 조기 강판의 수모를 겪어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익숙한 그가 승리가 아닌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미국 기자들 앞에 선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우승에 목말랐던 엘에이다저스 담당 기자들은 그에게 직설법으로 혹독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상대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선수에게 인종차별 수난까지 당한 터라 마음의 상처는 컸을 겁니다. 그럼에도 다르빗슈는 담담하게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결국 투수로서 제가 더 많은 서랍을 갖추는 게 과제입니다.”
서랍의 원래 의미는 책상과 옷장에 달린 수납공간이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뜻입니다. 자기만의 기술, 승부수, 독특한 경험, 정신 자세 등을 의미하는 일본식 비유법입니다. 투수로서 그가 말하는 서랍이란 다양한 구종(투수가 던지는 공의 종류), 승부구, 기술, 경기운영 능력, 큰 승부에 임하는 심리 등을 의미할 겁니다. 인생 최고로 괴로웠을 패배 다음 날 다르빗슈는 트위터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월드시리즈는 내 부족한 경기력 때문에 실망스러운 결과로 끝났지만 나는 이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 사람의 진면목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했을 때 나타납니다. 이란계 혼혈인으로 일본에서 자란 때문인지 그는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었습니다. 남의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전진하겠다는 그의 자세에서 저는 ‘위대한 패배자’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야구에 비유하여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공이 있나요? 다른 경쟁자와 비교해 공의 속도는 빠른가요?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과 같은 다양한 공을 갖고 있나요? 생활인으로서 당신의 무기는 무엇인가요? 당신만의 킬러 콘텐츠는 어떤 건가요? 사회생활을 하며 돈을 번다는 것은 프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엔씨(NC)다이노스 야구단의 이태일 사장은 프로야구 선수로서 새롭게 출발하는 루키(신인)들에게 이런 말을 던져줍니다. “프로 선수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여준다는 것은 곧 오디션입니다. 영원한 1등은 없고, 영원한 고객도 없습니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 비즈니스 세계의 현실입니다. 결국은 더 많은 서랍을 마련해야 합니다. 한두개의 서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디션에서 다양한 장르의 곡을 소화해야 올라갈 수 있듯이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패를 겪어보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위기가 왔을 때 이겨내기 어려워합니다. 위기 극복 항체가 심리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오늘의 패배가 결코 인생의 패배는 아닙니다. 자기 비하, 자기 의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타이틀이라는 ‘직’(職, 직위·직무)의 경쟁에서는 비록 졌지만 진정한 프로로서 ‘업’(業, 일·전문성)의 힘을 키울 기회가 될 겁니다. 그러면 다시 일어나 전진할 수 있습니다.
패배는 통과의례입니다. 업의 힘을 한 단계 올려주는 기회로 삼으세요. 그러면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남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멋진 리더로 성장시켜줄 겁니다. 기회는 또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