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려 컴퓨터를 켜니 첫 화면에 북해(北海)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푸르게 투명한 하늘 아래 하얀 설산(雪山)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아래, 하늘보다 더 짙푸른 바다 수면 위로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유유히 물살을 가릅니다.
순간 전율울 느낍니다.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반지르르 기름기 도는 검은 피부를 자랑하며 차디찬 북해를 늠름하게 헤엄쳐가는 저 고래. 너무 아름답고 너무 경이롭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어찌 저리도 멋진 생명체가 있게(有) 되었을까.
기독교인이며 힌두교도들은 무한하신 창조주 하느님께 깊이 머리 숙일 터이고, 불자들은 저 고래에게서 부처님의 비어있는 성품, 즉 공(空)을 볼 겁니다.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이름이요, 유(有)는 만물의 어미를 이름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와 유, 이 둘은 본시 같은 것인데 이름이 다를 뿐이라 했습니다.
현대 과학은 무에서 빅뱅이 일어나 유가 시작되었고, 원소, 먼지, 별의 순서를 거쳐 마침내 생명체가 나타났답니다. 그리고 기나긴 진화의 무대에 북쪽 바다의 저 아름다운 고래며, 우리 집 마당가를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신퉁방퉁한 개미들이며, 빤짝빤짝 빛나는 꼬마 녀석이며, 빨간 꽃망울 유도화 화분 한 귀퉁이를 염치없이 가득 채운 까마중들이 등장해서 저마다 있음(有)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긴 세월 이런 저런 생각들 사이를 헤매 다니다가 이제는 이 모든 생각들이 다, 같은 말씀의 여러 변주곡이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피조물이란 말은 저 스스로 독립적으로 고유 성품을 유지하며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니, 있음(有)도 아니고 있지 않음(無)도 아닌 공(空)한 성품이라는 불교의 개념과 같은 소리요, 무와 유가 본시 같은데 이름이 다를 뿐이라는 노자 말씀이나 빅뱅이며 진화론이 다 그 소리가 그 소리지 싶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이름, 개념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니 유니 무니 불성이니 하며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으나, 한번 말이 되고 나면 결국 그 말에 매여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하느님’하고 이름 붙이니 우리 보다 힘 센 ‘존재’의 하나로 여겨 살려 달라 빕니다. 하지만 주역에서 신은 어떤 고유의 모습이 없고 단지 어짐(仁)으로 나타나고 사랑이라는 작용 속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비가 온다’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습도가 높아지고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는 조건의 결과물이 ‘내리는 비’입니다. 그런데 비가 온다고 ‘말’해 버리면 마치 ‘비’라는 고정된 존재가 있어 어디 숨어 있다가 지금 여기로 떨어지는 양 착각을 하게 됩니다. 착각을 피하려면 용수 스님 식으로 ‘내리는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게 좋을 듯도 합니다. 비는 피조물이고, 공(空)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나’라고 말하고 나니 이 ‘나’도 우주 시작 이전부터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지금 이 생에 나타났고 죽은 뒤에도 다시 어디로 이동하는 걸로 생각지어 집니다.
그런가?
오래전, 그러니까 2005년, <공동선> 5, 6월호에서 오현 스님도 이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불교에서는 기독교의 부활을 어찌 보느냐는 물음에 스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는 부활은 시체가 다시 사는 게 아닙니다. 순간순간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는 게 부활이죠.
불교에는 一日一夜(일일일야) 萬生萬死(만생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 낮 하루 밤에도 만 번이나 태어나고 만 번이나 죽는다는 뜻입니다. 매 순간 생과 사가 갈린다는 거죠.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죠. 과거에도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오로지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타력신앙인 기독교와 자력신앙인 불교는 서로 다른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스님 답변은 이랬습니다.
“교인이 천 명이면 하느님도 천 분이라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씨 예수님이 깃들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탐욕과 죄로 인해 예수님의 모습이 가려져 있을 뿐이죠. 거듭남을 통해 참된 나를 회복하면 내 마음 안에 있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되살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염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가 예수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가 예수입니다.
» 생전의 조오현 스님
불교가 불상을 갖다놓고 부처라 하며 복을 구하듯이, 십자가를 세워두고 복을 구하다보니 이런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거죠.”
불교 윤회사상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기독교 맹신자들 생각과 비슷한 데가 있지 않느냐고 묻는 데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나는 보살로 태어나며, 누군가를 못 살게 굴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 아수라로 태어나는 거죠. 착한 마음은 보살과 선인으로, 악한 마음은 아수라와 악인으로 윤회하게 합니다. 윤회는 죽어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끝없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부활도 이생에서 끝없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옛 것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거듭나고, 바로 그 거듭남이 곧 부활인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코린트 후서 5장 17절이 떠오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오현 스님은 생전에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절집은 승려들의 숙소일 뿐이니 절집에만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지 말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찾고 세상과 함께 하라.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없다. 천년 전 중국 산 속 늙은이들이 뱉어 놓는 죽은 말들(선사들의 법어)만 듣고 살지 말고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나누라”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모욕받고 상처받더라도 저자거리로 나가라.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속한 모임이나 본당, 거기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갇혀있다면 병이 들고 말 것입니다. 저는 병든 교회보다 길거리에서 사고를 당한 교회가 수 만배 더 좋습니다.”라 외치신 교황님 말씀과 꼭 같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삶과 죽음을 노래하셨습니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엊그제 오현 스님이 정말 새의 먹이로 가셨습니다. 어디, 고정 불변의 오현 스님이 있어 이 욕계(慾界)에 오셨다가 저 무색계(無色界)로 해탈하신 게 아니라‘새의 먹이로’. 아니, 새의 먹이가 되시는 게 바로 해탈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차디 찬 북쪽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가는 저 아름다운 고래나 오현 스님이나 벌레나 숲속의 새가 다 하느님의 피조물이요, 진화의 산물이요, 그 본 모습은 공(空)한 불성을 지녔답니다.
이글은 <공동선> 7,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