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호적나이 백세를 맞이하는 태종사 조실 도성큰스님 이야기
» 필자 현장 스님과 태종사 조실 도성 스님(오른쪽)
“나는 남 잘하는 것은 못하지만 남 못하는 것은 잘하는 사람이야.”
부산 태종대 태종사 수국축제를 다녀왔다. 태종대는 해운대와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태종대의 중심에 태종사가 자리잡고 있다.꽃가꾸기를 좋아하는 도성 큰스님께서 30년 전부터 심고 가꾼 수국꽃들이 크게 자라 영도구의 대표축제로 자리잡았다.
수국종류만 200여종 3000그루의 수국이 만개하니 만다라 화장세계가 펼쳐진다.태종대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태종사를 먼저 찾게된다.태종사 수국 축제기간에만 수만명이 찾아와 수국의 화려하고 다양한 꽃을 즐긴다.
마침 종무소에서 도성큰스님을 뵐수 있었다. 먼저 시유지이고 공원지역에 어떻게 사찰을 지을수 있었는지 물었다.태종대가 6.25이후에는 피난민들의 난민촌이 있었다.70년대 공원으로 정비되면서 모두 철거되었다.태종사는 그때 건립되고 건물을 모두 부산시에 기부 체납하였다.
“절을 지어서 부산시에 기부하니까 처음에는 안좋은지 알았어 그런데 시에서 관리해주니까 너무좋아..그리고 다음에 상좌들이 이 절을 팔아 먹을수도 없거든.”
큰스님은 1919년 출생으로 금년 연세가 백세이다.
내가 물었다..신문과 잡지에 큰스님 나이가 두가지로 나오는데 실제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호적 나이는 금년 백세이고 실제는 94세 을축생이야”
보통 생년이 늦을수는 있는데 어떻게 6년이 넘게 호적에 올렸나요?
“그게 남모르는 기술이야”
스님께서는 북한출신으로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끊기고 포로가 되어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때 포로 수용소장이 미군장교 딘소장이었다. 북한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을 포로로 잡은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제네바 포로협약을 제대로 준수하라고 훈계를 하고 석방해주었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났다.그는 지체없이 절을 찾아 출가했다.그때 찾아간 절이 부산 선암사였다. 여덟번을 쫒겨났다가 아홉번을 찾아가 출가를 허락받았다.석암스님과 지월스님이 계셨는데 지월스님의 제자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때 호적을 만들었는데 또 군대가지 않으려고 여섯살 올려 호적을 만들었다고 고백하신다. 너는 생긴것도 못나고 성질도 급하니 매일 108배를 하고 참회문을 써서 항상 참회하면서 살아라...,하는 석암스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왔다.
북한에서 절에 다녔는가 물어보았다.효봉스님 속가집하고 이웃마을에 살았단다.평안도 우랑사라는 절에 다녔고 함께 내려온 인민군중에 스님출신도 있었다고 한다.
도성스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위빠사나수행을 최초로 소개시킨 분이다.한국불교에 출가해서 당대의 선지식들을 만나 보니 언행에서 존경심이 생기지 않았다. 해인사 총무할적에 거해스님께 차비를 마련해 주고 부탁하였다.남방스님들은 출가해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수행하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하였다.
거해스님이 미얀마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익히고 돌아왔다.1988년 마하시쎈타의 우판디 사야도가 처음으로 한국에 오셨다.서울 승가사 비구니선원에서 21일간 집중수행이 마련되었다.한국불교에 공식적으로 위빠사나수행이 전수되는 현장이었다.
지난 2009년에는 테라바다불교의 상가라자로 추대되었다.근본불교 승왕이란 뜻이다. 1978년 해인사 주지를 역임하셨으며 1989년에는 대흥사주지와 교구본사주지연합회 회장직도 역임하셨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에 출가했지만 남방불교에 귀의하여 남방가사를 걸치고 맨발에 샌달을 신고 지내신다.태종사는 조석예불도 빠리어로 모신다.
도성 큰스님께서 남긴 유명한 말씀이 있다.
“남방스님들은 무슨 일을 할려면 부처님 계율에 맞는지 점검하고 결정한다.그런데 한국 스님네들은 무슨일을 할려고 하면 계율보다 이익이 얼마나 남는가를 계산해 보고 결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