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에 올라 왔다. 오늘 초하루법회를 하기 위해서 이다.길상사에 올때마다 오늘의 길상사를 있게한 김영한 길상화보살의 사당에도 분향한다. 한국의 시인 156명에게 설문하였다.한국의 현대시 백년동안 최고의 시집을 물었다.영광의 1위에 오른 시집이 백석의 사슴이었다. 사슴은 1936년 100부한정판으로 발간된 시집이다.그당시 윤동주도 시집을 구하지 못해 지인에게 시집을 빌려 손수 필사하여 간직했다고 한다. 신경림시인은 백석시집 사슴을 읽으며 밥 한숟갈 먹고 꼬박 밤을 세웠다고 한다.
백석시인은 김영한의 연인이었다.백석은함흥 영생여고의 영어선생이었다.동료교사의 전별장소인 요정에서 당시 22세의 김영한과 처음 눈빛이 마주쳤다.백석은 26세 청년이었다. 단 한번 부딪친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이었다.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백석은 자야 김영한을 위하여 한편의 시를 남긴다.
김영한과 백석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내리는 밤 힌 당나귀를 타고 산곬로가자/.../출출히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언제 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산곬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건 덜어워 벌이는 것이다.//
눈은 푹푹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집안에서는 기생과의 결혼을 반대하였다.백석은 만주로 떠났다.그후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L.A고려사에 원주보살로 대도행보살이 있었다.김영한과 대도행보살은 친구사이이다. 무소유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김영한은 대도행보살에게 법정스님을 소개받았다.몇번 만남끝에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번거로운 일 싫어하는 법정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받아달라..싫다..십년간 되풀이 되었다.다른 큰스님들이 대원각을 자기에게 시주해달라고 물밑접촉도 몇차례 들어왔다. 그건 김영한 여사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맑고 향기롭게 시민운동이 시작되면서 임원들로부터 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원각을 아무 조건없이 사찰로 받아 들이기로 다시 대화가 되었다.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오늘의 길상사 낙성식이 열렸다. 그때 김영한 여사가 대중들에게 말했다.그가 한 말은 짧고 분명했다.
» 법정스님
나는 배운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불교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를 모시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제소원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던 저 팔각정에 종을 달아 힘껏 쳐보는 일입니다.
법정스님께서는 김영한 여사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리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어주었다. 낙성법요가 끝나고 기자가 물었다.오늘 수천억대 재산을 시주하여 사찰을 만들었는데 재산이 아깝지 않습니까? 내가 평생 모은 돈은 백석의 시한줄만 못하다.나에게 그의 시는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쓰고싶다..길상화 보살의 짧은 답변이었다.
대원각이 번창할때는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이 삼백명이 넘었다.이제 길상사에는 자원봉사자가 삼백명이넘는다. 사람도 하나의 요정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쾌락과 욕망만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무상을 느끼고 수도승이 될수도 있다. 서울의 3대요정으로 손꼽히던 대원각도 주인이 맘먹으니 조석으로 목탁소리 끊이지 않는 삼보의 가람이 되었다. 다음은 김영한 길상화 보살의 간단한 약력이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16세 나이로 금하 하규일 문하에서 진향이란 이름을 받고 권번기생으로 입문하였다.여창가곡.궁중무등을 익히며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하였다.
1937년 천재시인 백석을 만나 자야라는 아명을 받았다.
1955년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을 오픈하였다.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였다.7000평의 대원각터와 40여동의 건물을 수도사찰로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1997년 12월 14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창건되었다.
김영한 길상화보살은 1999년 11월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다비후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길상헌 뒤편 언덕에 뿌려졌다.그 자리에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이세워진 것이다.
*자야 김영한은 매년 7월 1일이 되면 일체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허공만을 바라 보았다.그날은 백석의 생일이었다.